형식이 아니라 ‘신호’ 끊기
교무실 문이 닫히고, 아이가 내 책상 앞에 섰다.
손에는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종이가 얇게 떨렸다.
“선생님… 절대평가면 좀 나아질까요?”
그 눈빛은 간절했다.
나는 그 간절함이 슬펐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를 묻기 전에,
먼저 “어떻게 매길까”를 붙잡아야 하는 세상이 슬펐다.
상대평가냐 절대평가냐.
우리는 그 말을 너무 오래 붙들고 싸웠다.
하지만 형식만 바꿔서는 아이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을 움직이는 건 ‘평가 방식’이 아니라,
그 뒤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 신호는 단순하다.
“줄을 서라.”
중간·기말 정기고사가 그 신호를 교실에 뿌린다.
수능은 그 신호를 전국으로 키운다.
대학별 시험이 늘어나면 신호는 더 날카로워진다.
신호가 살아 있는 한,
상대든 절대든 아이들은 결국 “불리하지 않게” 움직인다.
그래서 절대평가를 해도,
정기고사로 줄을 세우면 과목쏠림은 그대로다.
절대평가를 해도,
수능이 버티고 있으면 수업은 문제풀이로 빨려 들어간다.
절대평가를 해도,
대학별 시험이 늘어나면 사교육은 더 빠르게 길을 낸다.
반대로 말하면 이렇다.
형식이 조금 달라도,
줄세움 신호를 끊으면 학교는 달라질 수 있다.
아이들은 “몇 점이냐” 대신 “무엇을 해냈냐”를 묻는다.
선택은 계산이 아니라 뜻이 된다.
배움은 줄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삶을 넓히는 일이 된다.
아이들이 바라는 건 ‘절대평가’가 아니라, ‘끝’이라는 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학교다.
그럼 신호를 어떻게 끊을까.
첫째, 정기고사가 선택을 끌고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한 번의 시험이 아이의 길을 움켜쥐지 못하게,
지필 중심 줄세움을 줄이고 수업 속 해냄과 자람을 살피는 쪽으로 옮겨야 한다.
둘째, 대입이 학교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수능·대학별 시험 난립이 ‘끝판’처럼 버티면
학교의 모든 좋은 시도는 결국 거기로 빨려 들어간다.
대입에는 전국이 함께 쓰는 공통 장치가 있어야 하고,
대학 전형에는 상한이 있어야 한다.
셋째, 공정함은 더 단단히 세워야 한다.
신호를 끊을수록 “그럼 믿을 수 있나”가 더 크게 찾아온다.
기준은 미리 드러나야 하고,
몇 가지를 뽑아 살피는 손도 있어야 하고,
억울하면 다시 살필 길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도 무너지지 않고, 아이도 무너지지 않는다.
상대냐 절대냐는 종종 ‘쉬운 싸움’이다.
편을 갈라 말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신호 끊기는 ‘어려운 일’이다.
돈과 시간과 규칙을 함께 바꿔야 한다.
그래서 더 해야 한다.
형식의 싸움을 멈추고, 신호의 싸움을 끝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