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했는데 ‘미개설’? 주제로 선택하자!

개설권은 ‘선의’가 아니라 배움권이다

게시판 앞에서 학생이 한참을 서 있었다.

과목 신청 결과표에서, 자기 이름을 찾더니 숨이 멎는 듯했다.
옆에 빨간 글씨가 찍혀 있었다. 미개설.

“선생님… 제가 고른 건데요. 왜 못 들어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선택’은 종이에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과목이 실제로 열리지 않으면, 선택은 권리가 아니라 허락이 된다.
그리고 허락은 늘 “사람이 적어서”, “선생님이 없어서”, “시간표가 안 맞아서”라는 말 앞에서 무너진다.


그래서 개설은 ‘선의’가 아니라 배움을 누릴 권리여야 한다.
권리라면, “열어줄 수도, 안 열 수도”가 아니라
열리게 만드는 장치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마지막에서만 싸운다.
미개설이 뜬 뒤에 “왜 안 열어줘요” “어쩔 수 없어요”가 오간다.
이 싸움을 끝내려면, 샘에서부터 마르게 하지 않는 길로 바꿔야 한다.


그 샘은 바로 “학생이 배우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힌트는 **주제배움(융합·통합)**이다.
칸막이 과목은 인원이 갈라지기 쉽다.
A 과목 7명, B 과목 6명, C 과목 5명… 이렇게 쪼개지면
어느 순간 다 “미개설”이 된다.

하지만 주제로 묶으면 다르게 흐른다.

예를 들어 “기후와 우리 동네”라는 주제는
과학만이 아니라 사회, 수학, 국어, 예술이 함께 들어온다.
학생이 “관심사”로 모이면, 교과 칸막이로 흩어지지 않는다.
작은 학교에서도 주제 하나로 묶어 함께 열 수 있고,
권역으로 넓히면 더 쉽게 함께 열 수 있다.


이미 우리 안에도 길은 있다.
교육부는 학생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공동교육과정·온라인학교·학교 밖 교육 등을 운영한다고 밝히고 있다.(교육부) 공동교육과정은 “학교에서 개설이 어려운 과목”을 학교 간 연계로 여는 제도이고, 운영 형태도 대면·원격·혼합으로 다양하다.(교육부) 경기도처럼 공동교육과정 운영 길라잡이를 따로 만들며 “학생 수요 기반 개설”을 강조한 곳도 있다.(정부23) 즉, 미개설은 ‘운명’이 아니라 ‘설계’ 문제다.


다른 나라들은 더 노골적으로 “주제”로 길을 낸다.
핀란드는 교과를 넘는 현상기반(주제) 배움을 교육과정에서 강조해 왔다고 소개된다.(dams.pa.go.kr)
또 국제적으로 쓰이는 IB의 MYP 과정에서는 해마다 최소 한 번 이상 교과를 함께 엮은 융합 단원을 운영하도록 요구한다.(International Baccalaureate®)
유에스(미국)의 일부 공립학교들은 프로젝트 기반 배움(PBL) 길(패스웨이)을 따로 두고, “해 보며 배우는 수업”을 학교의 중심으로 세우기도 한다.(Santa Monica High School)


이 보기들이 말해주는 건 하나다.
“과목이 안 열리면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안 열리게 되는 구조를 먼저 바꿔야 한다는 것.

정리하면, 미개설을 샘에서부터 줄이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관심사 주제 과목을 먼저 설계한다.
학생들이 실제로 모이는 주제부터 잡으면, 인원이 갈라지지 않는다.

둘째, **권역 공동시간표(공동 슬롯)**를 만든다.
시간표가 맞지 않아 무너지는 일을 먼저 막아야 한다.

셋째, 함께 여는 수업+돌며 가르치는 사람+소인원 운영비를 세트로 붙인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다시 “미개설”로 돌아간다.


아이에게 “선택하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열리게 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그 약속이 제도와 돈과 사람과 시간표로 서야 한다.
그때 아이는 게시판 앞에서 묻지 않을 것이다.

“왜 못 들어요?” 대신,
“저는 이 주제로 무엇을 해볼까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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