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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May 29. 2020

05. 네물루빔 체스키

타지에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

몇 해 전, 한국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초록색 시내버스가 안산 시내를 빙빙 돌아가며 정류장에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정류장에선가. 갑자기 버스는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리곤 기사님과 버스 앞 좌석 쪽이 잠깐 동안 시끄러웠다. 그 앞에는 파키스탄 아이 한 명이 서있었다. 기사님은 요금을 안 내고 들어가려는 학생을 막아섰다. 


"돈 내야지! 안 내고 그냥 타면 안 돼! 빨리 여기다가 돈 내 어서."


기사님은 학생한테 호통을 쳤다. 


"항국말 모태요. 항국말 모태요."


곧이어 파키스탄 학생은 이 말을 반복하고 손으로 엑스 자를 그려 보였다.


"한국말 잘 하는구먼!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야."


그런 학생을 보고 기사님은 성이 나서 더욱 큰소리를 냈다.


서로 간의 대화라고 할 수 없는 일방적인 호통이 이어지던 중,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적, 내가 맡았던 학생이기 때문이다.


"아배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기사님 이거로 찍을게요."


나는 교통카드를 찍고 서둘러 학생을 데리고 와 버스에 앉았다. 얼마나 놀랬을까. 그 커다란 눈은 더욱 커져서 한동안 주눅이 들어있었다. 아배스는 이제 막 가, 나, 다, 라를 다 배운 학생이었다. 나랑 대화할 때는 영어로 말을 했고 가족들은 모두 파키스탄 사람이라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았다.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한국어 못 해요'는 어디서 배웠는지. 그 앞에서 항국어 모태요를 중얼중얼 거리고 있던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 마음에 죄 없는 버스기사 아저씨의 뒤통수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프라하에 온 지금, 때때로 그 버스에서의 해프닝과 아이의 커진 눈망울이 계속 생각난다. 내가 비슷한 처지가 되어서 그런 것일까. 역시 자신의 피부로 와닿아야 비로소 실감한다. 아배스가 본능적으로 내뱉은 '한궁말 모태요' 처럼 나는 '네물루빔 체스키'를 뱉고 다닌다. 마트에서 계산을 하다가 아주머니가 $%&^$#$@^%$& 라고 말을 하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네물루빔 체스키'. 버스를 탔는데 기사님이 ^&$%^$$#^&* 라고 말을 하면 나는 또 다시 '네물루빔 체스키'. 택배 아저씨가 벨을 누르고 &^%^$&^%^ 라고 말하면 언제나처럼 '네물루빔 체스키'. 


'네물루빔 체스키'는 체코 어학원에서 네 번째로 배운 말이었다. 첫째가 도브리덴 안녕하세요. 둘째가 뎨꾸유 감사합니다. 그리고 셋째가 빠르돈 미안합니다. 생존 체코어 네 번째가 네물루빔 체스키 '체코어 못 해요'이다. 처음에는 체코어를 배우러 와서 체코어 못 한다는 말을 외우고 있는 것이 웃겼다. 그런데 '체코어를 못 한다'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는데 쓸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방적인 호통을 그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동시의 나를 고립시키는데 사용되었다. 내가 네물루빔 체스키를 시전하면 사람들은 백이면 백 말을 끊고 단념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나 말을 섞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다니는 존재가 됐다. 


아 말을 못 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전하지를 못 하니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문제 될만한 행동을 만들지 않으면 말을 걸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행동을 조심한다는 것은 곧 주눅 든다는 것이다. 눈치를 보고 어깨가 처졌다. 핀볼 게임 속 그 공이 된 듯했다. 내가 닿는 곳이면 다 나를 튕겨냈고 나는 튕겨나갔다. 적응을 하고 살아가려면 사회 속에서 환대를 받고 소속감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말을 못 하니 어디에서든 외로웠다. 다행히 직업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어로 하는 일이었던지라 내 유일한 소속감을 일에서 찾았다. 오죽하면 일하는 날에는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과 대화를 실컷 나누고 오면 적어도 '말 못 하는 사람'이란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후로 체코어 공부를 했다. 숫자를 배우고 필요한 동사를 익혔다. 한국에 살 때는 몰랐다. 한국어로 친구랑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주문할 때는 알지 못했다. 태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언어발달과정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던 것인지를. 모국어의 유창성과 정확성은 자, 따라 해봐 엄마 엄마 시절을 거쳐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받아쓰기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하루에도 수천 번 사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도움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언어를 0에서부터 쌓아 올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개념이었다.


특히 문법 체계가 완전히 다른 체코 어의 경우 더욱 그렇다. 체코어는 모든 명사가 여성, 남성, 중성으로 나뉜다. 동사는 주어에 따라 형태가 바뀐다.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것은 따로 외워야 한다. 명사는 목적어 자리에 들어가면 마지막 철자가 달라진다. pes는 강아지라는 뜻의 단어인데 이게 목적어 자리에 들어가면 난데없이 psa가 된다. 형용사 역시 꾸미는 명사가 여성이냐 남성이냐 중성이냐에 따라 형태가 바뀐다. 이 모든 것들을 배우다 보면 왜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영어를 많이 쓰는지 알 것도 같다. 상대적으로 영어가 쉽게 느껴질 정도이다.


공부를 세 달 정도 했나. 여전히 언어는 늘지 않고 사람들의 말은 그저 귀를 통과해 빠져나갔다. 나는 여느 때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웃는다. 하지만 이전보다 '체코어 못 해요'를 예쁘게 포장해서 말할 줄 알게 됐다. '빠르돈. 스투드유 체스티누 알레 모예 체스키 네니 도브리' 해석하자면, '죄송합니다. 체코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제 체코어는 좋지 않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괜찮다며 손을 저어 보인다. 어떤 할머니는 내가 중국인인 줄 알고 '쒜쒜'라며 길을 떠났고 어떤 아주머니는 'It's okay I can't english okay okay me too'라며 웃어주었고 어떤 아저씨는 '도브리 도브리'(GOOD GOOD) 잘하고 있다는 뜻의 응원을 주기도 했다. 더듬더듬 말을 하려고 노력이라도 하니 사람들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어쩌면 그들이 튕겨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네물루빔 체스키'를 시전하기 급급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모두가 더듬거림 앞에서 자애로운 반응을 주는 것은 아니다. 대놓고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초리를 받으면 다시 서러움이 울컥 몰려온다. 속으로 유치한 생각도 한다. 너네는 한국어 모르면서. 나도 한국 가면 말 잘 하는데. 어리고 유치해라. 그래도 어쩌나. 체코에 살고 있는 내가 체코어를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을. 다시 유치하지 않은 내가 나를 다독인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듬더듬 헤아려가는 중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와 체코에 살면 체코어 잘 하겠다. 거기 사니까 언어는 금방 늘겠는데? 따로 공부 안 해도 그냥 잘 하지 않아?" 하고 말이다. 그럼 나는 고개를 숙이거나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한다. "전혀." 언어는 그곳에 산다고 해서 저절로 늘지 않는다. 직접 부딪혀서 공부를 하고 단어를 암기, 연습해야 찔끔 늘어나는 것이 언어이다. 그러고 보니, 새삼 유학 다녀온 친구들 중에 영어를 잘 하고, 살다 온 친구들 중에 그 나라 언어를 잘 하는 사람들 보면 그 안에 숨겨진 노력이 얼마나 컸을까 대단해 보인다. 내가 게으른 탓인지 아직 내 체코어 언어발달은 유아기~어린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거 필요해요. 이거 뭐예요. 저는 현주에요. 맥주 주세요. 이거 좋아요. 저거 나빠요. 말을 하다 보면 나도 내 체코어에 웃는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잼잼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다. 내가 잼잼이보다 말을 못 한다. 내 목표는 잼잼이만큼 말을 하는 것이다.


타지 생활의 첫 관문은 '말 못 해요'를 떼는 것이 아닐까. 체코에 온 지 1년하고 4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 이제서야 '네물루빔 체스키'를 떼고 하나둘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타지에 사는 것은 그 나라에 가서 다시 아기가 되는 것 같다. 첫 1년은 갓난아기 2년째부터는 걷는 아기 3년, 4년, 5년의 성장기들 말이다. 그 과정 속 답답함과 서러움이 때로는 울컥 터져 나오지만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보니 인생 2회차를 겪는 것 같아 재미있다. 나의 2회차 인생의 무대에서 말 좀 속 시원히 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더불어 아배스를 비롯한 고향을 떠난 모든 이들의 걸음마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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