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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un 05. 2020

내가 사랑한 일들-上. 동심의 세계

나의 아르바이트 시절 이야기

요 며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만 콕 박혀 있으니 답답함이 하늘을 찌른다. 내 꿈은 만년 백수였건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렇지도 않다. 열정 쏟을 일 하나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라도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더랬다. 나는 감사하게도 그간 내가 하는 일들을 사랑했다.


19살. 수능을 막 치른 후 처음 한 일은 키즈카페 놀이 선생님이었다. 나의 10대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2013년 그 마침표를 찍는 해는 더욱 그랬다. 본디 게으른 탓에 남들처럼만 하는 것도 힘들었다. 수능만 끝나면. 고3 만 끝나면. 20살만 되면. 그 모든 조건을 걸면서 19살의 시간들을 희망고문으로 버텨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들뜬 해방감에 맨 처음 했던 것은 아르바이트였다.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만큼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 당시 나는 돈이 필요하다기보다 어른의 문턱을 밟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10대를 보내며 가장 하고 싶었던 강렬한 첫 경험은 '어른'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매년 12월 31일 자정, 술집에 달려가 민증을 손에 쥐고 술을 사 마시는 그 연어떼처럼 말이다.


2013년 11월 넷째 주. 나의 첫 출근이 시작됐다. 나의 일은 홀서빙 및 고객 응대였다. 하나 실은 스태프 룸에 들어가 유니폼을 갈아입는 것에서부터, 키즈카페에 뛰어노는 모든 아이들의 잠재적 친구가 되어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는 잊지 말 것, 가위바위보에서 지고 우는 척하는 것, 이기면 너무 기뻐하지 않는 것 등등 모든 것들이 나의 업무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엄마놀이였다. (사실 가정 역할극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아이들의 언어를 그대로 빌려와 쓰는 점 양해 바란다.) 


"선생님!!!! 엄마놀이해요!!!" 누군가 높은 데시벨로 나를 부르면 그것이 엄마놀이의 시작이었다. 고객은 다양했다. 말을 하기 시작하는 4세 아이들은 주로 멀뚱멀뚱 눈을 굴리다 언니가 시켜주는 아기가 되거나 깍두기가 된다. 놀이를 담당하는 것은 보통 5~6세 아이들이었다. 적극적인 아이들은 나서서 나의 역할을 정해준다. 보통 '엄마' 역할은 아이들이 가져가고 나는 아이의 정서에 따라 그 집의 아빠, 아기, 강아지, 선생님 그냥 지켜보세요 등등의 역할을 맡는다. 대부분 내가 했던 역할은 아빠였는데 내가 해야 하는 대사와 처한 상황을 모두 아이들이 그려낸다. 아이들의 밑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아이의 부엌이 보이고 거실이 보이고 늦은 저녁 상차림이 보인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선생님, 이제 선생님이 아빠예요."


"그래~ 그럼 이제 뭐 할까?"


"여보~~이제 맥주 마실 시간이에요. 짠! 같이 마셔야지!"


그 조그만 입에서 능숙하게 맥주를 마시자는데 그럼 저녁인데 맥주 한잔해야지 하고 자연스럽게 승낙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한편으로는 유쾌한 곳에서 밝게 자라고 있구나 싶어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적어도 이곳에 오는 아이들은 힘겹게 자라는 아이들은 없겠지. 어딘가에 있을 다른 아이들도 생각이 났다. "선생님 왜 웃어요? 빨리 놀이해야죠!" 여섯살 앙칼진 고객님의 목소리에  빨리 복귀를 했다지만 아직도 그날이 눈에 선하다. 


그런가 하면 하루는 이런 날도 있었다. "선생님 잠깐 이리 와 봐요. 오늘 000분 오셨으니 조심하셔야 돼요. 그 아이는 저기서 놀고 있으니까 특별히 봐주시고요." 출근하자마자 점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키즈카페 특성상, 교육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을 훈육할 수 없다. 그래서 점장님 나름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깐깐한 고객을 특별 관리한 것이었다.


리스트에 오른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아이들은 평균 혹은 그 이상 유별나지만 그의 부모님들은 평균을 발로 차버릴 만큼 유별났다. 왜 우리 애한테. 우리 애가. 우리 애인데. 아이들이 놀이 활동을 하다가 잘못을 일으키면 부모님이 훈육을 해주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훈육 대신 '우리 애' 안경 안에 시야가 갇혀 그러질 못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점점 혼자 놀아야 하는 아이, 같이 있으면 불편한 아이가 되어갔다.


내가 같이 놀았던 아이는 이미 멸종한 공룡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다 기억하던 똑똑한 아이였다. 안경 너머 반짝이던 눈이 참 예뻤는데. 아이의 단짝은 공룡들이 전부였던 그날은 놀이 내내 마음이 쓰였다. 교육 선생님이 아닌 놀이 선생님이기에 간섭할 수 있는 영역도 제한적이다.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날은 최선을 다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밖에. 지금으로부터 7년 정도가 흘렀으니, 이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텐데. 부디 좋은 친구들과 잘 어울려 노는 배려 깊은 아이가 되었길 바란다.


하루하루 유니폼 안에서 나는 4세에서 7세 아이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그러던 2014년 어느 여름, 나의 첫 번째 직장은 사장님이 키즈카페 사업을 접으면서 끝이 났다. 마지막 근무 날. 유니폼에서 다시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수박 미끄럼틀, 대형 계란 프라이 카펫, 무지개 색깔로 유니콘이 돌아가던 회전목마. 키즈카페의 크고 작은 장난감들이 하나둘씩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의 손에 실려 갔다. 그 모습을 엉엉 울고 있던 사장님의 7세 딸아이와 함께 봤다지. 서럽게 우는 아이 옆에서 내 마음도 울적했더랬다.


7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들이 그립다. 그때의 함께 놀던 아이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어른의 문턱에서 다시 나를 동심의 세계로 돌려준 곳. 유니폼을 갈아입으면 평균 5세가 되어야 했던 곳.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들키면 까르르 웃으며 민들레 씨처럼 달아났던 아이들. 보물 찾기, 엄마놀이, 누가 더 높이 뛰나 시합하기, 기차 탈 시간이에요 모이세요. 모든 것들이 떠올리면 따뜻한 것을 보니 정말 사랑했었구나 싶다.


한편, 2014년 키즈카페 폐점으로 아르바이트를 잘리고 만 나는 이제 뭐 먹고살아야 하나 알바천국을 켜는데.... 나의 다음 일자리는 무엇이 될지. <내가 사랑한 일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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