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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un 09. 2020

내가 사랑한 일들-下.국수와 성인식

나의 아르바이트 시절 이야기

"현주야. 너 뭐해? 아니 지금 뭐 하냐는 게 아니구. 지금 하는 일 있어?"


전화가 걸려왔다. 키즈카페에서 같이 일했던 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2014년 여름, 사장님의 폐점 결정으로 인해 함께 놀았던 아이들도 같이 일했던 언니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지 얼마간 지난 후였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해서 급급했던 시기라 그 전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언니가 일하는 곳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내 생각에 준 전화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거기 어디에요? 연락을 끊고 언니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언니는 도착한 나를 보고 반겨주었다. 까만색 유니폼과 함께 풍겨오는 씁쓸한 고수 향이 그곳의 첫인상이었다.


 "어서 와. 지금 급하게 사람 구하는 거라. 그건 그렇고 너 쌀국수 먹어본 적 있어?"


쌀국수요? 전화 한 통에 채용된 곳은 쌀국수 음식점이었다. 수원역 뒤에 위치한 2층짜리 매장으로 사람들이 늘 붐비는 나름의 핫플레이스였다. 언니는 다른 것보다도 쌀국수를 잘 먹냐고 물어봤다. 이곳은 손님이 없는 3시쯤 다 같이 식사를 하는데, 주로 쌀국수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라 일을 하려면 먹을 수 있어야 한다며. 나는 얼떨결에 뭐든 잘 먹는다 대답을 하고 사장님을 만나 짧은 면담 끝에 바로 일터에 투입되었다.


이제 막 투입된 내게 주어진 임무는 매장의 테이블 번호와 메뉴를 암기하는 것이었다. "그냥 주방에서 이모님들이 음식 해주시면 가져다드리면 돼. 쌀국수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언니의 말투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언니랑 함께니까 힘든 일은 별로 없겠지.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언니의 손을 잡고 전쟁터에 뛰어든 것일 줄은. 역전에 있는 모든 음식점은 장사가 욕 나오게 잘 된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첫 한 달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쌀국수는 내 생각보다 무거웠고, 뜨거웠고.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빨리 먹고, 빨리 떠났다. 회전율이 어찌나 높은지 엉덩이를 붙이려 하면 일어나서 치웠다. 유독 힘든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만 봤다. 옆자리 언니도 그랬다. 서로의 힘듦을 물어 무엇하랴. 침묵 속에서 서로의 고됨을 짐작할 뿐이었다. 다시는 못 하겠다. 매일을 다짐했더랬다.


하지만 여전히 종소리를 생각하면 그때를 추억한다. 맑고 짧은 종소리. 나는 그 소리가 그립다. 내가 일한 곳은 주방과 홀이 분리된 구조였다. 홀에 있으면 주방에서 음식이 언제 나오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모님들은 음식이 다 준비되면 종을 치셨다. 그 소리를 듣고 누구보다 빠르게 주방으로 튀어가는 것이 내 일이었다.


어쩜 이리 빨리 오노. 디땨 빠르네. 역시 젊으니 좋아. 세 명의 이모님들은 번갈아가며 칭찬을 하셨고, 나는 어느새 파블로프의 개가 되었다. 한 번은 손님이 없는데 종이 울렸다. 잘못 들었나. 땡. 잠시간의 정적 후 소리가 들려왔다. "애더라 일리 와 본 나." 주방에 가니, 이모님께서는 작은 호떡을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씩씩하니 잘 허네. 그려 손두 빠르고. 이 정도 힘든 건 힘든 것두 아니댜. 그 말 한마디 한 마디가 호떡보다 달았다. 이후로 이모님들은 수시로 종을 울렸고 나는 부침개를, 국수를, 강된장 비빔밥을, 때론 마른 입으로 수다를 떨며 사탕 같은 시간을 보냈다.


내 생애 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교복을 벗고 법적인 성인이 되면서 나의 경제적인 독립도 함께 시작됐다. 대학생이 되니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게다가 차비는 왜 이렇게 비싼지. 경기도에서 경기도를 가는데 한 달에 십만 원을 넘게 썼다. 급식 먹을 때는 몰랐지. 매끼를 내 돈으로 사 먹어야 하니. 디저트로 빙수까지 먹자는 친구들과 함께 하려면 아르바이트는 내 생애 필수조건이었다. "현주 너는 왜 학교 끝나면 바로 집 가?" 친구들의 질문이 그때는 괜히 아팠다. 응 나 일하러 가야 돼. 말하면 될 것을 혼자 속을 썩인 적도 있었다.


그때 나를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릇을 깨고 계산까지 실수해서 울었던 그날. 그날은 쌀국수 그릇이 왜 이리도 무거웠는지. 국물은 눈치 없이 뜨거웠고. 사람들은 내 속을 알 리가 없었다. 마감을 앞두고 그릇까지 깨고 나니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서러움이 눈물로 터졌다.


퉁퉁 부은 눈으로 설거지를 하는데 이모님이 그러셨다. 뚝 해라. 이제 고만 해라. 됐다. 그 정도 울었으면 많이 울었다. 이렇게 크는 기다. 할머니들이 거친 손으로 손주를 쓰다듬을 때. 그 손이 아리지만 따뜻하지 않나. 나는 그 손아귀를 잡은 듯했다. 이상하게 펑펑 운 그날부터 내 안에는 단단한 무언가가 생겼다. 그것은 어른이요. 책임감이요. 철이 든다는 것이요. 여전히 뭉친 서러움이요. 뒷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배짱 같은 것이었다.


이후 나는 소위 말하는 고참이 될 때까지 쌀국수 집에서 일을 했다. 두 번 이모님이 바뀌고 세 번 언니와 친구들이 바뀌어 가는 동안, 평생 먹을 만큼의 국수를 팔았다. 한 그릇 두 그릇이 켜켜이 쌓여가며 그렇게 나만의 성인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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