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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un 11. 2020

오늘의 알코올

향수의 기록

혼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었다. 지금은 2020년 06월.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강타하고 마스크를 쓰는 신인류가 된 지 6개월 정도가 지났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뜨린 전염병은 이제까지 현존했던 전염병과는 차원이 달랐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전염병이야 말로 인류역사에 새로운 지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를 뒤바꿀 정도의 역사인데 한 개인인 내가 영향을 안 받을 리 없다. 2020년의 나는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았다. 원래도 집에만 있는 삶을 살았지만, 더욱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덕에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여 요리가 늘었다. 술이 먹고 싶을 때는 혼자 홀짝이는 습관도 들였다. 혼자 마시는 술이 더 맛있다는 것을 점차 알았다.      



내 취향은 화이트 와인이다. 같이 일하는 동기는 백포도주라고 부르는 술이다. 동료들은 그가 화이트 와인을 백포도주라고 부를 때 마다 옛사람이라며 놀린다. 자연스레 이름 모를 하얀 수염 난 할아버지가 ‘허허, 이 백포도주가 참 달큰하구나.’ 하며 눈을 꿈뻑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도 따라 꿈뻑이며 백포도주를 입에 적신다.     



요즘 새로 들인 습관은 포도주에 얼음을 띄우는 것이다. 13도의 알코올을 750ml 가량 누리기엔 다음날 견뎌야하는 숙취가 심해서 종종 속임수를 쓴다. 여름이 다가오는 지금 얼음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노르스름한 황금빛 와인에 투명한 얼음을 넣으면 와인잔 표면에 울긋불긋 물방울이 맺힌다. 물방울이 많이 맺힐수록 여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작은 방울들이 모여 툭 떨어지면 이제는 한여름이다.     



한 모금 들이키면 몸이 스르르 풀린다. 노곤노곤. 눈이 감기고 시선이 느려진다. 주위 모든 것들에 천천히 눈을 두고 한동안을 멍하니 쳐다본다.     


한 모금. 달다. 

한 모금. 알싸하다.

한 모금. 뜨겁다.

뜨거움이 코로 올라와서 머리를 덥힌다.     


한 모금. 잠시 쉴까.


한 모금. 윽. 갑자기 쓰다.     


그만 마셔야 하나. 이제는 귀까지 뜨거워서 정신이 몽롱하다.      


이럴 때면 난데없이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대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 옆 상가 술집에서 총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총회를 술집에서 할 건 뭐람. 대학의 모든 일정은 술집에서 시작해서 술집에서 끝이 났다. 아무튼. 그 때 한 동기가 계단에 앉아 엉엉 울었던 것이 기억난다. 서럽게 울었다. 남들은 말했다. 내버려둬. 원래 저게 주사야. 술만 마시면 저래.

      

그렇구나.     


그 때는 그 신기한 주사를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술을 마시곤 곧장 우는 사람의 버릇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약간 추해보이네. 그 정도의 평가를 속으로 삼키고 남은 알콜을 비우러 2차,3차로 향하곤 했다. 그 때 옆에서 같이 울었다면, 나는 그 친구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을까.     


이제는 노곤해진 몸을 안고 종종 운다. 한 번은 기뻐서 울었다가, 한 번은 불쌍해 울었다가, 한 번은 외로워 울었다가, 한 번은 그냥 울었다가, 또 한 번은 방금 베어 물은 아보카도가 맛있어서 울었다.      


어른들은 말했다. 술이 달게 느껴지는 날이 있어. 그게 어른이야. 소주가 써? 얼마나 단 술인데 이게. 과학실 실험 냄새를 뭐가 달다고 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던 그 아이는 몰랐다. 커서 꿀떡 꿀떡 와인이 넘어갈 때면 그 어른의 말을 종종 떠올렸다. 혹시 내가 이렇게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풀어지는 몸으로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동기를 생각했다. 혹 취하지 않은 삶이 외로웠는지 하고 말이다. 한국에 살 때는 취하기만 하면 간식을 한 보따리 사서 집을 향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 동생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내가 좋아하는 초코렛을 검은 봉투에 담아 집에 갔다. 자꾸만 식욕이 돋아 길마다의 편의점을 들르는 나에게서 감춰진 외로움을 보기엔 내 삶이 벅찼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면 다음날 해장국이 잘만 들어갔다.     



달다가 쓰다가 알싸하다가 나를 덥히는 와인을 먹으면 이 곳 생활이 더 고요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간식을 사서 갈 가족들이 이 곳에 없어 그런가, 눈물이 툭하면 흐른다. 달그락 달그락. 와인잔 속 얼음들의 마찰만이 그 고요를 깬다. 다음날에서야 이것이 향수였음을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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