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주 Jun 19. 2020

죽도 밥도 아니지만

나는 아플 때 간장죽을 먹는다. 밥에다 물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풀이 나와 희멀건 한 죽처럼 변한다. 밥알이 냄비에 붙지 않게 숟가락으로 젓다가 간장 한 스푼, 참기름 한 스푼을 넣으면 간장죽이 된다. 네 맛도 내 맛도 아니지만 아플 때는 꼭 간장죽을 찾는다.     


처음 간장죽을 먹은 것은 여덟 살 무렵이었다. 그 당시 몸살에 걸린 엄마는 바닥에 요를 깔고 누워있었다. 엄마의 머리에는 축축한 손수건이 올라와 있었고 엄마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는 이불 속에서 손 끝 하나 꼼짝 못 하고 누워 있었다. 흡사 젖은 빨래 같았다. 그런 엄마에게 죽을 쑤어준다고 아빠는 부엌을 기웃거렸다. 나는 그 상황이 그저 웃기고 신기하기만 했다.      


아빠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내였다. 아빠는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 수원의 한 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 사내는 키는 작지만 행동이 빨랐다. 몸은 다부져서 어딘가 민첩하고 야무졌다. 사내는 그런 재능을 살려 역도를 했다. 역기를 드는 일은 생각보다 잘 맞았다. 하지만 일등만 알아주는 스포츠계에서 번번이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고 왔다. 집 안 곳곳에 철제 통을 열어젖히면 녹이 선 동메달이 한 움큼씩 나왔다. 내가 메달들을 찾아 꺼내 놓으면 아빠는 조용히 등을 보였고 메달들은 어느 순간 다시 철제 통에 들어가 있었다.     


역기를 들던 아빠는 내가 태어나면서 버스 운전을 시작했다. 나는 운전하는 아빠를 늘 뒤에서 지켜봤다. 그래서인지 아빠하면 늘 뒷모습이 생각난다. 아빠의 어깨 너머 보이는 커다란 창, 그 사이를 지나는 풍경들, 아빠의 손에 따라 움직이는 지구만한 핸들, 눈앞에 보이는 행성 같은 버튼들. 그 등 너머에 있는 우주를 볼 수 있는 것은 운전사 딸의 특권이었다. 그 날부터 지나가는 버스마다 다 아빠가 운전하는 줄 알고 손을 흔들고 다녔더랬다.      


나는 집에서도 늘 아빠의 뒷모습을 봤다. 밥을 먹을 때면 아빠를 제외한 모두가 상차림을 했다. 내가 수저를 놓고 동생이 젓가락을 놓고 내가 밑반찬을 가져오고 동생이 물을 가져오면 엄마는 마지막으로 뜨거운 국을 들고 왔다. 그렇게 엄마가 앉으면 아빠는 수저는 들었다. 아빠는 그릇을 다 비우고 다시 등을 보이며 뉴스를 봤다. 아빠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그렇게 잡수신 탓이었다. 아빠는 좀처럼 앞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부엌에 들어가 냄비를 달그락 거리고 있다. 부엌 한 번을 안 들어오던 아빠가 냄비를 찾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덟 살 눈에도 그 모습은 충분히 우스웠다.      


“아빠 뭐하게요?”


나는 아빠 옆을 알짱거리며 물었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을 놀릴 때 나오는 말투가 묻어나왔다.     


“뭐하기는. 엄마 아프다잖냐.”


아빠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냄비가 어디 있더라. 야 밥은 이거 쓰면 되는 거냐. 아빠는 궁시랑 거리며 좁은 부엌을 한참 산만하더니 냄비를 꺼내 물을 담아 올렸다. 그리고선 불을 세게 올려 펄펄 끓인 후에 밥솥에서 차게 식은 밥을 툭 던져 넣었다. 고체처럼 딱딱했던 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물에 풀어졌고 얼마 지나 제법 죽의 모습을 갖췄다. 죽이라기 보단 끓인 밥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아빠는 그 죽에 간장 한 스푼 참기름 한 스푼을 넣고 휘휘 저었다. 그것이 아빠의 간장죽이었다. 나는 그 짧은 조리 과정 내내 참견을 했다. 냄비에 숟가락을 푹 찔러 넣고 호호 불어 입에 가져왔다. 아빠의 간장죽은 웃음이 나는 맛이었다. 한 입은 짜고 한 입은 싱겁고 한 입은 죽 같은데 한 입은 밥 같았다.      


“어떠냐. 맛 좀 있냐?”     


그런 나를 보며 아빠는 물었다. 아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창피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모든 것이 서툰 사람의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나는 퍽 재밌었다. 엄마는 안방에서 마른기침을 하는데 나는 신이 나서 부엌을 돌아다녔다. 자꾸만 아빠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그 때는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웃음이 나는 간장죽 때문에 장난기가 발동한 줄 알았다. 서투른 표현을 하는 한 사내의 사랑법이 아름다워 그러한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아빠는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죽을 쑤었다. 아빠의 사랑은 이렇게나 서툴렀다.     



몇 해가 흘러, 내 나이 열한 살부터 엄마와 아빠는 따로 살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랑 살았고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집을 방문했다. 그 날은 내가 용돈 받는 날이었다. 아빠는 점퍼 차림으로 손에는 김이며 과일이며 어디서 받아온 것인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보따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늘 점퍼 안 깊숙이 넣어둔 봉투를 꺼내 검지와 엄지에 침을 묻히고 한 장 한 장 만 원권을 셌다. 열 장은 나, 다섯 장은 동생, 백 장은 이번 달 생활비라며 엄마에게 건넸다. 아빠는 가기 전에 늘 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 덕에 한 달에 한 번은 거하게 고기를 먹고 된장찌개에 밥까지 비볐다.     


아빠를 열두 번 보면 한 해가 흘렀고 또 다시 열두 번을 보면 학년이 바뀌었다. 그 사이 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 만큼 아빠와의 공백은 채울 수 없이 벌어졌다. 어느새 집은 시끌벅적 하다가도 아빠만 오면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나랑 동생은 쭈뼛거렸다. 아빠는 어느 날부터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봉투만 건네고 다시 집을 나섰다. 봉투 속 만 원권은 백장을 채웠다가 모자랐다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아빠는 더 빨리 집을 나섰다. 시간이 지나 아빠의 방문은 한 달의 한 번이 두 달의 한 번이 되고 반년에 한 번이 일 년에 한 번이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중학교 졸업장을 받고 고등학교 교복을 벗고 대학교 학사모를 던졌다. 10년의 세월은 무언가에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에겐 아빠 없는 가족 모임이, 아빠 없는 저녁 식사가, 아빠 없는 졸업식이 그랬다. 이후 우리 가족이 온데 모여 한 곳에 있던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러던 작년 겨울 온 가족이 공항에 모였다. 내가 해외취업을 하여 프라하로 떠나는 날이었다. 분명 공항에는 출발 다섯 시간 전에 도착한 듯 했는데, 탑승수속을 밟아야 하는 시간은 어느 덧 앞당겨오고 있었다. 줄을 서고 가족들이랑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동생이 덩달아 울었다. 모녀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의 안녕을 비는 동안, 아빠는 그 관경을 지켜봤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려, 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눈을 피했다.      


삑. 삑. 분주한 소리가 울리는 공항에서 사람들은 탑승권을 찍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 마. 다녀올게! 울다가 웃어보이다가.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로 가족들을 뒤로 하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풀어 헤치고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서 검사를 받았다. 표에 적힌 게이트를 찾아 근처 화장실에서 양치를 했다.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얼마나 긴 여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즐기다 오기를 기도했다.      


비행기 탑승 과정은 생각보다 빨랐다. 표에 적힌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짐을 정리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한 숨 잘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잡아보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승객들도 하나 둘 비행기에 오르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출발하기 1분 전. 달달 거리는 비행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아빠한테서 온 전화였다.     


“어? 아빠? 여보세요?”     


“어, 뭐냐? 지금 통화할 수 있냐?”     


“곧 있으면 출발해야 돼서 끊어야 돼요.”     


“아, 그러냐. 아니 그냥. 잘 들어갔나 해서. 그려. 조심히 다녀오고.”     


“네, 걱정마세요.”     


안전벨트 표시등이 켜지고 승무원이 곧 이륙한다는 음성을 알렸다. 아빠도 참. 이제 끊어야 되는데. 마음이 바빠졌다.     


“아빠 저 이제 진짜 가봐야 돼요.”


“그려.”     


그리고 뒤에 이어 나온 말을 듣고 나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딸아, 사랑한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아빠가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이었다. 평생 그 순간을 바라온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 상상한 적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서 나를 안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내게 등을 보여서 앞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실은 그런 말을 내뱉기엔 그저 표현에 서투른 것뿐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없어서 나를 추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그 날 비행 내내 눈물을 쏟으며 프라하로 향했다.   

  

프라하에서 글을 쓰는 지금 그 때를 종종 떠올린다. 오죽하면 비행기 안에서 일기를 썼다. ‘아빠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다. 2019년 1월 어느 날’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빠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간장죽 같이 죽도 밥도 아닌 것이었다. 맛도 없고 볼품은 더 없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아프면 간장죽을 그래서 찾는다. 허한 몸과 마음을 그것이 채운다. 한 입, 고소한 참기름 향 사이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두 입, 사이사이 느껴지는 간장의 짭짤함으로 입맛이 돈다. 세 입, 어딘가에서 나를 사랑하고 있을 그를 떠올린다. 이게 뭐라고 약이 된다. 죽도 밥도 아니지만. 죽도 밥도 아니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아리송한 첫 이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