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주 Jun 23. 2020

07. 인종차별만 있나, 그렇지도 않지

다수의 선량함을 기억해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서러운 순간을 겪는다. 말을 못 할 때, 웨이터가 주문을 늦게 받을 때, 계산대에서 아주머니가 답답하다는 듯 쳐다볼 때, 길을 가다가 니하오 소리를 들을 때. 1년 전, 정착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잊을만하면 겪는 인종차별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다행히 생활이 길어질수록 현지인의 분위기가 나에게도 풍기는지, 이후 불쾌한 경험들은 점점 줄었다. 하지만 겪을 때 밀려오는 빡침 (분노라는 표현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 감히 분노 따위가 묘사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리고 서러움은 꽤 오래 마음을 괴롭혔다.


하나 돌이켜 보면 그간 나의 순간에는 인종차별만 있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너희들, 들어봤니?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무릇 이 세상에는 정해진 만큼의 또라이들이 있다는 뜻이란다. 그러니 너네가 살면서 이상한 사람, 너희를 낙담시키는 사람, 힘들게 하는 사람, 한 마디로 '와 저 새끼 또라이네'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냥 가볍게 무시하렴. 아, 정해진 질량 중에 하나구나 하고 말이야. 


선생님의 이 진리와도 같은 말은 해외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통했다. 몇몇 정해진 질량의 인종차별 및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빼고는 좋은 사람들을 지나쳐왔기 때문이다. 뭐, 해외 살면서 인종차별만 있나? 그렇지도 않지. 그 이야기를 전한다.


그중 하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쌀이 아닌 빵을 좀 사볼까 싶어 빵 코너를 기웃거렸다. 종류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두가 하나같이 장발장이 훔쳐 갔다는 것처럼 생긴 팔뚝만 한 크기의 빵이었다. 사람들은 저걸 기계에 넣어서 버튼을 누르고 얇게 잘라서 가져갔다. 기계의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웬 아저씨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 대충 해석해보자면, 이 빵을 여기에 넣어서 이 버튼을 누르면 돼. 자, 쉽지? 이런 느낌이었다. 봉투에 잘린 빵을 넣고 다른 장을 볼 때까지 계속 말을 붙이며 이거저거 설명을 해주시는데. 아저씨,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속으로는 울상을 짓고 싶으나 낯선 이에게 받는 친절이 이렇게도 달콤한지 절로 미소가 나왔다. 뎨꾸유. 뎨꾸유. 연신 감사합니다를 남발하며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중 둘.


트램을 탔다. 친구랑 나란히 앉아 어디서 내리면 되는지를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 데이비츠카 가는 거지? 응, 데이비츠카에서 내릴 거야." 그 말을 어떻게 들은 건지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노선도를 가리켰다. HERE! DEJVICKA! HERE! HERE! 그리곤 얼마나 가야 데이비츠카에 도착하는지를 한 칸 한 칸 손으로 세면서 알려주셨다. 뎨꾸유. 뎨꾸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체코어로 뭐라고 말하더라. 체코어를 궁리할 시간에 아주머니에게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겠다 싶어 뎨꾸유를 세 번 더 말했다. 뎨꾸유. 뎨꾸유. 뎨꾸유.


그중 셋.


꽃집을 갔다. 혼자 살기가 외로워 키우기 시작한 반려 식물 클레멘타인(?)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고... 그 정도로 외롭지는 않다. 살 때 화분에 클레멘틴이라고 쓰여있었다.) 이 너무 잘 자라 분갈이가 필요했다. '이 정도 크기의 화분이 필요해요.'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알 리가 없다.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검은 요괴처럼 '아..... 아....'를 남발했다. 아주머니는 잠시 당황하더니 내가 필요할 만한 모든 물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거?' '아니면 이거?' 다 들어 보였다. 흡사 몸으로 말해요 게임과도 같았다. 나는 그중 화분에 가까운 물체에서 더욱 크게 '아!!!!'를 외쳤고 다행히 원하는 크기의 갈색 화분을 사서 왔다. 계산을 하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그럴 때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있다. 빠르돈. 모예 체스키 네니 도브리. (죄송해요. 제 체코 어가 좋지 않아요.) 그럼 보통은 그냥 웃고 만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 너그러움이 보통이 아니었다. 빠르돈 모예 앙글리츠키 타키 네니 도브리. (죄송해요. 제 영어도 좋지 않아요.)


그중 넷.


그중 다섯.


그중 여섯.


여기에 쓰지 않은 그간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대부분은 정말 사소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의 친절이었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확실히 친절의 질량은 또라이의 질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더욱 느낀다. 외국인 신분의 삶은 때론 차별을 겪지만 한편으로는 친절을 더 많이 겪는다. 장을 보다가도, 트램을 타다가도, 동네 가게에서도. 낯선 이의 친절은 불쑥 불쑥 나타나서 나를 돕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이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아무렴 또라이의 질량이 무거울지언정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은 친절의 순환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덧붙이는 글


-할머니는 말했다. 네가 열 사람을 만나면 여덟 정도는 다 괜찮은 사람이야. 아니면 그냥 관심 없이 지나가거나. 그런데 꼭 그 두 놈이 나머지 여덟의 몫까지 해서 열 명치의 아픔을 준다고. 그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두 놈이 아니야. 나머지 여덟인 게지. 그 여덟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돼.



매거진의 이전글 06. 미용실에 가기 어려운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