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미리 말하지만 과장이 심한 편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직도 그 순간 그때의 그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대학교 1학년 무렵에서 출발한다. 당시 우리 과 (영문과) 정원은 사십여 명 정도였다. 입학을 하고서 여느 학교가 그렇듯 우리 과에서는 과대를 선출했다. 과대는 과 정원 명단을 받아 학생들을 초대하여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다.
단체 대화방은 꽤나 쓸모 있었다. 급하게 나온 공지를 알려준다거나 혼밥 하는 여럿들을 한 데 묶어주었다. 특히 학기 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제격이었다. 사십여 명이 한 데 모여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란 불가능하다. 졸업할 때까지 서로를 몰라서 어느 날, "얘가 우리 과였어?" 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단체 대화방은 그런 상황에서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됐다. 이를 테면, 동기들의 프로필 사진을 염탐하고 상태 메시지로 근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의 유형은 다양했다. 동네방네 연애 중임을 알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온 세상에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요즘 말하는 '갬성'이 담긴 여행지에서의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며 대개 이런 반응을 했다.
어, 얘 여자 친구 있었네?
헐! 강아지 너무 귀엽다ㅠㅠ
와... 예쁘다 어디서 찍은 거지? 보라카이인가?
그중에서도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태 메시지가 있었으니, 토마토의 메시지였다. (구독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지인이라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을 쓴다. 실제 이름은 토마토와 전혀 관련 없음.)
"응원해주세요!"
뭘 응원해달라는 거지? 토마토의 상태 메시지는 그 이후로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비슷했다. 응원해달라, 좋아해 달라, 들어달라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응원의 대상이 누군인지 알았다.
"방탄소년단 응원해주세요!"
방... 탄.. 소년단? 그게 뭔데? 동기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2014년.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때는 방탄 소년단이 무엇인지도 먼 미래에 그들이 세계를 흔들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이구 바보들.)
어쩌면 6년 전 토마토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토마토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사촌 형인데 데뷔해서 활동하고 있어! 노래 많이 들어줘~"
방... 뭐? 나는 생각했다. 이름이 뭐 저래. 소년단도 소년단인데 방탄은 또 뭐야. 총알 막아주는 그 방탄 얘기하는 거 맞나? 그리고 겉으로 말했다. "오.. 신기하다. 그래!"
후로 토마토의 상태 메시지는 줄곧 사촌 형이 소속되어 있다는 그룹을 응원하고 또 누군가에게 응원을 바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모이면 줄곧 과 동기들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했다. 그러다 토마토의 이름이 언급되면 하나같이 '아~ 그 형이 방탄소년단!' 하고는 곧장 다른 소재로 넘어갔다.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하는 토마토를 보며 그 모습이 특이하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방탄소년단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불어 토마토도 함께. 어디 계신지 다들. 그 방향으로 절이라도 해야겠으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방탄소년단 덕분에 밥을 먹고살고 있다.
2020년 01월.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아시아부터 유럽까지 전 세계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여행 가이드로 채용되어 프라하로 온 지 1년여 만에 일이었다. 바이러스는 예상보다 빨리 퍼졌고 유럽 대응은 생각보다 강경했다. 체코는 두 달 가까이 식료품점, 약국, 병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았다.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경까지 봉쇄했다.
이 상황에서 여행이 말이 되냐고요. 당연히 안 되지. 걱정과 불안에 섞인 나는 자주 이렇게 구시렁거렸다.
결국 일이 뚝 끊겨버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한 경력이 있으니, 국제학교며 온갖 학교의 구인광고를 찾아 이력서를 넣었다. 다들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해야 뽑아준다는데. 내 영어실력으로는 택도 없었다. 몸으로 뛰는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괜히 콧대만 높아져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번뜩, 누구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한국어! 이 유럽에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호기로운 마음에 한국어 과외 선생님 프로필을 작성하고 학생을 모집했다.
놀랍게도 올린 지 일주일 만에 연락이 왔다. 그것도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연락이었다.
"우리가 '드디어' 한국인 선생님을 찾아 기쁩니다! '당장' 한국어 수업을 하고 싶어요. 가능하면 빨리 수업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보통은 시범수업을 하고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데, 이 연락에서는 이미 결정 난 듯 보였다.
학생 이름은 비올레타.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아이였다. 그 말똥말똥한 눈을 보며 나는 말했다.
"Why do you want to learn Korean?" 왜 한국어가 배우고 싶은 거예요?
"Because... it sounds pretty and I want to learn Asian language." 소리도 예쁘고 아시아 언어를 배우고 싶어요.
이미 스페인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영어를 할 줄 아는 비올레타는 이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역시 땅이 다 붙어있어서 그런지 유럽 애들이 언어에 특출 나다며 속으로 생각했다. 언어를 잘하니까 이제는 아시아 언어도 배우고 싶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며 정식 수업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비올레타 집에 간 첫날,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어디에서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유럽 땅이 다 붙어있어서도, 어머니가 헝가리분 아버지가 이탈리아분이라서도, DNA에 언어 유전자를 물려받아서도 아니었다. 다른 DNA면 몰라도.
그것은 몇 년 전, 내가 웃어넘긴 가수 때문이었다. 침대 옆, 피아노 위, 선반 앞, 책상에는 온갖 방탄소년단의 사진과 액자가 걸려있었다. 디스 이즈 알엠. 디스 이즈 진. 디스 이즈 슈가. 디스 이즈 제이홉. 디스 이즈 지민. 디스 이즈 뷔. 디스 이즈 정국.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하나하나를 비올레타는 손으로 가리키며 쭉 읊었다. 그 커다란 눈은 더 반짝이며 움직였다. I LOVE BTS! I LIKE KOREA! 비올레타에게 BTS는 한국이었고 한국은 BTS였다.
온 방에 있는 사진 속 알엠과 진과 슈가와 제이홉과 지민과 뷔와 정국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순간 얼마나 민망스럽던지. 6년 전 내 모습이 오버랩되며 방탄소년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면 방향을 찾아 절을 해야 하나. 어느 방향에 계신가요? 덕분에 제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백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토마토에게 연락해서 6년 전 우습다고 생각한 나를 용서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새가슴인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내리 방탄 소년단의 이름만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정국이 알엠에 본명인 줄 알았는데... 다른 멤버였구나.' 방알못(방탄소년단을 알지 못하는 자)인 나는 어딘가에 있을 토마토의 그의 사촌 형을 떠올렸다.
방탄 소년단이 이름처럼 총알을 막고 내 밥줄을 만들어 줄 줄이야. 그대들은 정말 방탄 소년단이군요.
이후로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며 프라하 살이를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비올레타 집을 들어설 때면 사진 속 비티에스 멤버들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황급히 눈을 돌리고 책을 편다. 뒤통수가 어쩐지 따가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