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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Aug 25. 2020

한 뼘 더 우리가 된다

엄마는 우리 엄마인데, 왜 동생은 내 동생일까. '우리 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우리 동생' 음에 맞추어 노랫말을 천천히 읊어보았다. 아무리 따라 불러도 우리 동생은 입에 안 붙는단 말이지. 역시 동생은 '나의' 동생이 더 어울렸다.


원래 우리의 것보다는 내 것에 더 소홀해지니까. 내 것에 더 적은 존경을 표하니까. 그래서 가족 구성원 중에 우리 엄마와 아빠보다는 내 동생에게 더 홀대를 했다. 이를 테면 컴퓨터가 잠깐이라도 느려지는 날에는 동생 탓부터 한다던지, 옷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당장 전화해서 어디에서 내 옷을 입고 있느냐고 묻는다던지, 반응이 귀엽다는 이유로 자주 울린다 던 지를 해왔다. 그럴 때면 동생은 정말로 이를 악 물고 울었다.


동생이 태어난 직후 엄마의 육아가 두 배가 되었을 때, 엄마의 머리채는 줄곧 누군가에 손아귀에 잡혔다. 엄마 말에 따르면 한 녀석을 재우고 다른 녀석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머리채를 잡혀서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고 했다. 머리채를 잡은 녀석이 나인지 내 동생인지는 기억에서 흐려졌고 엄마의 고개가 계속 뱅뱅 돌아갔다는 사실만이 머리에 남았다. 아마 그 무렵 손아귀 힘이 더 강한 녀석은 나일 확률이 높으니, 내가 그랬을 것이다.


세 살배기 아기는 사회화가 삼 년 치 밖에 안 되어서 공감능력이 떨어졌다. 스물여섯의 나는 엄마의 머리 뿌리가 얼마나 흔들거렸을지, 자고 있는 동생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눈을 껌뻑였을지 약간 미안하다. 다 큰 내 손아귀에 힘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굳어버린 잼 뚜껑을 확 열어젖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시절 나는 어땠을지 괜히 주먹을 쥐어본다.


나는 손아귀에 힘만큼 고집도 셌다. 고집이 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꾸만 내 통제하에 두려는 마음가짐이다. 그 무언가는 자주 동생이 되었다.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무렵에 강한 기억이 있다. 나는 침대 위에 근엄하게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동생을 불렀다. 일부러 큰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퍽 퍽 이불을 두어 번 쳤다. 여기 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럼 동생이 쪼르르 와서 앉았다.


이후에 동생한테 쉼 없이 말을 했다. 그 말들은 고작 삼 년 더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들이었다.


"야, 너 이제 중학생이야. 너 중학생 되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고, 너 내신 들어봤어? 이제 그런 거도 신경 써야 되고. 그리고 친구들이랑 밤늦게 자꾸 놀러 가는데, 엄마가 허락해도 조심해야 된다. 알지? 야 중학교는 그냥 뺑뺑이 돌려서 가지만 고등학교는 정해서 가야 된대. 무슨 말이냐면, 중학생 때부터 잘해야 된다는 거야. 그니까 너 이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먼저 산 인생이 삼 년 밖에 안 되어서, 5분 단위로 같은 주제를 얘기했다. 그렇게 여섯 번을 반복해서 30분쯤 지나면 설교는 끝이 났다. 그 30분을 콧방귀 한 번 안 뀌고 가만히 들었던 동생이었다. 삼 년 치의 경험이 쓸모 있어서라기 보단 그즈음 시작한 부모님의 맞벌이가 내 권위를 높여주어서였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엄마가 없을 때는 네가 엄마야. 그리곤 동생에게 말했다. 네는 언니 말 잘 듣고. 싸우지들 말고. 그 말은 꽤 강력했다. 서로가 서로의 엄마를 위해 선을 지켰다. 아마 동생이 나를 따른 것은 나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엄마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둘은 우리 엄마를 두고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


다만 그 선을 넘는 날에는 크게 싸우곤 했다. 한 번은 엄마한테 물었다.

"아, 진짜 짜증 나. 나는 동생이 너무 싫어. 엄마는 쟤를 왜 낳았어?"


그럼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그러지 마. 다 너 위해서 낳은 거야. 동생한테는 비밀인데, 너 혼자면 심심할까 봐. 너한테 좋은 친구 생기라고 낳은 거야."


엄마는 최대한 비밀스럽게 꼭 동생이 없는 곳에서만 그 말을 했다. 나는 그럴 때면 당황스러웠다. 내 탄생이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서 비롯된 것이라면 싫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생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느낌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이 나를 위해 수단이 된 이야기를 들으니,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나 때문에 태어났다는데, 내가 이렇게 미워해도 되는 건가. 받는 이가 원하지 않는 선물은 어찌해야 하는 건가. 이걸 동생이 아는 날에는 가출이라도 하는 것 아닌가.


그 날 저녁, 엄마와 나 둘 사이 비밀 이야기를 간직하며 동생에게 잘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손아귀에 힘만 세고 순진했던 나는 엄마의 현명함에 넘어가 동생을 애틋하게 보기 시작했다.


커버린 나는 동생이 동생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누구의 딸로, 누구의 동생으로, 누구의 친구로, 누구의 애인으로, 누구의 상사로, 누구의 후배로 이리저리 오가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릴 적 꾐에 넘어가 품어버린 애틋한 마음은 뿌리를 내려 계속 커져 간다. 그 마음은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 동생아 하고 부르면 메아리가 쳐서 마음에 다시 울린다. 이제야 내 생애 소중한 선물이 동생임을 이해한다.


나는 프라하에서 동생은 수원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나: 지금 몇 시냐?

동생: 새벽 네 시.

나: 왜 안 자고 여태 깨어 있어?

동생: 나 원래 해 뜨면 자잖아.

나: 아ㅋㅋ 하긴 그렇지. 그래서 뭐 하는데.

동생: 그냥 폰. 아, 치킨 먹어 말아. 나 지금 네 시에 치킨 먹어 말아.

나: 먹어. 먹어. 너 안 먹으면 여섯 시에 그때 먹을걸 하고 먹는다.


대단할 것 없는 이런 안부들. 야식 먹어 말아. 프로필 사진 이거 해 말아. 이거 인스타에 올려 말아. 이런 작은 것들을 같이 정하고 대단하게 큰 것들은 혼자 정한 뒤 서로에게 통보한다. 나는 프라하에 온다고 통보했고 동생은 다음 학기를 휴학한다고 통보했다. 쓰고 거친 소리도 주고받는다. 동생에게 호감이 있는 남자가 아이린 사진을 보내며 누나 같아요 라고 했을 때도, 눈이 어디가 잘못된 것 같다며 안과를 추천했다. 이러나저러나 누가 보면 할퀴고 물어뜯어도 서로의 펀치가 재밌어 죽는다. 간밤 꿈에 엄마는 안 나와도 동생이 나올 지경이다. 일어나선 괜히 그리워 카톡을 보낸다. 그러면 또다시 서로의 야식 메뉴를 정해주고 프로필 사진을 골라준다. 별 다를 것 없는 하루가 가고 우리는 한 뼘 더 우리가 된다. 엄마의 사랑을 나누지 않아도 우리가 될 줄 아는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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