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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Sep 08. 2020

수학 선생님에 관한 모든 것

누구나 한 번쯤은 쓰고 텁텁한 가루약을 삼키듯 무언가를 몸서리치며 꾸역꾸역 해낸 일이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일은 대부분 모든 생애 주기에 걸쳐 꼭 하나씩은 있을 터인데, 꼭 이상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왜 그리 싫었나 웃음이 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스물여섯을 지나는 내가 십 년 전의 나를 돌아보며 웃음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이 나서 말인데, 그때의 나는 수학 시간이 쓰고 텁텁한 가루약 같았다.


그 무렵 나는 점점 어려워지는 수학에 일찌감치 네는 내 편이 아니구나 하고 선을 그었다. 마침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문과 이과를 나눈다는 정보를 듣기도 했다. 어쩜 너는 운명이 정해준 남의 편이구나. 더욱 내 길이 아니라며 단정 지었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수학을 덜 지겹고 지루하게 견딜 수 있을까 기를 쓰고 꾀를 부렸다. 다행인 것은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늘 수학 선생님만 괴로워 죽을 상으로 칠판을 탁탁 두드렸다.


그때의 수학 선생님은 머리가 길고 얼굴은 네모난 여자 선생님이었다. 늘 손에 팔뚝만 한 길이의 사랑의 매를 들고 다녔는데 그것으로 학생을 때리는 적은 한 번도 못 봤다. 손이 닿지 않는 칠판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칠판을 탁탁 쳐서 고개가 기우는 아이들을 깨우는 데 사용했다.


그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면 절반이 지날 무렵부터 조금씩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이들이 자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 매를 사용해서 큰 소리를 냈다.


어느 날은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꼭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 선생님은 무대장치를 꾸미는 일이나 연출하는 일을 했으면 좋았지 않았나 싶다. 무서운 이야기 이전에 꼭 교실 분위기를 그럴 듯 오싹하게 꾸몄기 때문이다. 꼭 문 가장 앞줄에 앉은 사람한테 교실 앞 문을 닫게 하고 문에 가까운 뒤 줄에 앉은 사람한테 교실 뒤 문을 닫게 했다. 그러곤 창가 자리에 앉은 아이들 두어 명을 시켜서 교실 커튼을 싹 쳤다. 이후엔 선생님이 저벅저벅 걸어 교실 전체의 불을 껐다. 커튼 사이로 얇게 비치는 빛만이 그 교실의 유일한 조명이었고 이내 학생들은 그것만으로도 겁을 먹은 듯 조용해졌다.


자... 선생님이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이야기가 시작됐다. 선생님은 낮은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조금씩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욱 숨을 죽이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 무서운 이야기는 이곳에 싣지 않겠다. 너무 빤한 학교괴담들 중 하나이기에 아마 다들 어느 선생님에게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한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 아이가 턱을 괴고 양 팔로 움직여 다가왔다는. 언제나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선생님이 턱을 괴고 양 팔꿈치로 교탁을 번갈아 치며 다다다다 소리를 크고 무섭게 내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 말이다. 그때는 그 교탁 소리와 교실의 어둠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학생들은 다 같이 꺄아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책상에 묻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며 불을 다시 켜고 자 이제 수업하자라고 외쳤다. 우리를 귀여워하는 선생님의 표정과 괴롭히려는 대사의 부조합을 보며 학생들은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수학 책을 폈다.


알약을 못 먹을 시절, 꼭 병원에서는 가루약과 함께 시럽을 처방해 줬는데 선생님은 본인의 수학 시간이 아이들에게 가루약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그렇게 중간중간 시럽처럼 무서운 이야기를 뿌리고 수학 싫어 병을 잠재웠다. 그래서 교복을 입은 십 년 전의 나는 아... 다음 수학이냐 하면서도 꼭 수학 책을 펴고서는 울상인 채로 숫자를 꾸역 써 내려갈 수 있었다.


한편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은 무서운 이야기 대신 느끼한 이야기를 그렇게 했다. 그 선생님은 안경을 쓰고 셔츠와 정장 바지를 곱게 다려 입고서는 교실에 들어왔었다. 선생님들 평균 나이보다 젊은 축에 속했던 선생님은 그 시절 살을 쪽 뺀 성시경을 닮은 외모였다. 목소리도 성시경과 비슷했던 기억이 있다. 가뜩이나 여자와 남자가 따로 배정되는 분반 시스템의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에게 선생님은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의 정석이었다. 공부하라는 수학의 정석은 그렇게 냄비 받침 정도가 되거나 쉬는 시간 사용하는 목베개가 되고 우리는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남자의 정석을 배웠다.


대강 이런 것이었다. 아 남자란 정장을 입는구나. 아 남자란 셔츠를 입을 때 팔뚝까지 걷어입는구나. 아 남자란 셔츠 단추를 조금 풀어 입고 그 사이로 목젖이 보이는구나. 아 남자란 목소리가 이 정도의 굵기로 나는구나.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선생님이 들려주는 느끼한 이야기 덕분이었는데, 그 이야기는 대부분이 선생님의 사랑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는 꼭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나오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선생님은 선생님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이었다.


특히 선생님은 이야기 속 자신의 등장과 자신의 첫사랑의 등장 그리고 그 둘이 이뤄지기 위해 본인이 한 노력을 최대한 느끼하게 얘기했다. 아마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무대연출가로 성공할 수 있을 테면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은 비중은 없지만 자기애에 대해선 세계 일등을 자랑할 수 있는 모 아이돌의 멤버 정도가 될 수 있었지 싶다. 자기 이야기를 잘하려면 그 정도 자기애는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선생님 왈, 선생님은 버스에서 만난 유치원 선생님과 사랑에 빠져서 연애 중이라고 했었다. 첫눈에 반해서 번호를 물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났던 선생님은 그만 자신의 핸드폰을 유치원 선생님 가방에 넣고 내렸고, 나중에 핸드폰을 돌려받는 과정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둘은 첫 만남에 카페에서 긴 시간을 같이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그분은 현재의 여자 친구가 되었더라는 해피엔딩까지 들려주었다.


그 사람이 지금 여자 친구예요.


꺄아아아아아


선생님의 이야기 클라이맥스는 이 부분이었다. 그러면 1학년 3반의 서른 명 정도 되는 학생들은 다 같이 고성의 비명을 지르며 어떡해~를 외쳤다. 서로의 어깨를 때리고 맞으며 난리를 치고 나면 선생님은 그제야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다 하네'라며 뒤늦은 쑥스러움을 전했다.


이후 선생님은 학생들이 수학을 못 견뎌할 때마다 본인의 러브 스토리를 하나둘씩 풀었다.


그럼 우리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로맨스의 정석을 탐구하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그런 일을 겪는구나 하며 어른들의 것을 상상을 했다. 행렬이고 나발이고에는 설레지 않는 가슴이 반응하는 때였다.


수학 선생님에 관한 모든 것을 쓰려했는데... 인생이 수학과 선을 그어 버려 그런지, 수학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도 결국 수학은 온데간데없고 이야기만 남았다. 나는 아무래도 구구단 하나면 충분히 남은 평생을 살 수 있지 싶다. 하지만 이야기가 없으면 영 재미가 없으니 지나간 과거도 돌이켜 이야기를 꺼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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