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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Sep 18. 2020

호사(豪奢)와 호상(好喪)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겪는 지구에서의 호사(豪奢)는 죽음까지도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그 호사와 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죽음은 외가댁 증조할머니의 죽음이다. 외가댁의 나무 마룻바닥.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나. 시야 너머 보이는 작은 문과 방 안에 누워있는 할머니. 딱 이 장면까지가 내 기억의 전부이다. 너무 어렸던 나머지 그 기억은 뿌옇게 흐려져 그저 내 시야 사이로 어른들의 다리가 보였다는 것뿐이 없다. 죄송하지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건지 고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인지조차 가늠이 잘 안됐다.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공기가 무겁고 숙연했다는 것, 그래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를 몰랐다는 것, 그 가운데 슬프지는 않았다 것이다. 어른들 중 누가 곡소리 나게 통곡이라도 하면 그에 맞춰 따라 앵하고 울었을 텐데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저 꺼져가는 불씨를 옆에서 조용히 보는 사람들 같았다. 그때는 그것이 죽음인지 몰랐는데, 다음 날부터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가늠만 했다.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구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그러고는 말았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한 가지는 그곳이 안전하다고 느껴서였다. 아마 그때의 내 나이는 말을 못 하는 세 살 배기였을 터, 그 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작은 살결에 불안을 느끼면 앵하고 울어버리는 생명이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고집이 세서 한 번 울 때 대차게 울었다고 한다. 한데 그곳에서의 나는 안전한 품 속에 있는 양 고요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곁을 지키는 사람이 많아서였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 옆을 나 혼자 지켰다면 나는 온몸을 다해 울고 떼를 쓰고 기어서 굳어가는 몸 위를 올랐을 것이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감지했을 테다. 하지만 그 당시 할머니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고요히 세상을 뜨셨다.


나중에서야 그 기억을 되짚는 나는 죽을 상에 좋을 호를 붙일 수 있는 호상의 뜻을 이해했다.


그와 동시에 최근에 경험한 죽음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그 생명을 죽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그 생명은 열심히 길을 거닐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밥도 먹고 잠도 잘 잤다. 그러다 어느 날 길 위에서 속수무책으로 무언가에 깔려 온몸이 바스러지고 내장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그 생명은 죽었다.


파삭. 바삭하게 튀겨진 감자칩을 먹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발밑에 바스러진 무언가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달팽이 었다. 아아아아아! 으악! 어떡해!! 뾰족한 등껍질 조각들 사이로 진물이 나오고 하얀 연고처럼 늘어져 버린 달팽이가 있었다. 분명 나는 그것을 죽였는데 그 사실보다 내 발밑에 있는 그 생명이 평소 징그럽다 생각한 것이라는 사실에 더 경악을 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입안이 메말랐다. 돋은 소름이 가라앉고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든 것은 나중이었다. 그 죄책감의 유효기간은 이틀 정도가 전부였다.


달팽이는 인간에게 밟혀 죽었다고 가족 달팽이들을 모아 장례식을 하지도 않을 테고, 달팽이들이 연대해서 인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을 테고, 경찰에게 인간을 가해자로 신고해서 억울함을 풀지도 않을 테니까. 그들의 죽음에 내가 질 책임이 별로 없다는 것이 죄책감의 유효기간을 더 짧게 만들었다.


이후 달팽이의 죽음이 나에게 작은 저주를 내렸는지 길 위에 죽은 생명들을 계속해서 만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 옆을 지났고 길가에 죽은 새나 짐승들을 보았다. 처음에는 눈을 질끈 감고 그들의 죽음을 못 본 체 여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잔상은 더욱 강하게 남아 어느 날은 고개가 돌아간 고양이의 모습이 어느 날은 피 칠갑을 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어느 짐승의 굳은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제야 달팽이에 대한 죄책감을 떠올리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만약 사람이 고개가 돌아간 체 길 위에 나뒹굴면 누가 그냥 지나칠까, 만약 사람이 피가 떡이 되어 굳은 채로 산에서 발견되면 누가 그냥 지나칠까, 만약 사람이 온몸이 바스러져서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면 누가 그냥 지나칠까. 분명 모두가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 생명이 인간이 아니란 이유로 그 몸이 썩어 없어질 때까지 죽음은 차갑게 나뒹굴었다.


이런 죽음이 내 것이 된다면 죽어서도 저승이 울리도록 울어버릴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의 죽음은 그것이 언제든 어떤 형태든 지구에서 겪는 생명체 중 호상에 속할 것이었다. 


달팽이는 죽어서 내 혼에 어느 부분을 갉아먹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 길에서 더 자주 죽은 생명을 만나는데 그때마다 내가 먹은 생명도 생각나서 자주 역해진다. 어느 생명의 죽음이 내 호사를 위해 쓰인다면 나는 역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고기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이다. 마음이 답답하다. 답답한 마음의 유효기간이 최대한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일말의 죄책감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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