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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Sep 30. 2020

한 번뿐인 마음으로

나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눈을 떴을 때의 세계 그리고 또 하나는 눈을 감았을 때의 세계다. 나는 눈을 감고 꿈을 꾸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 그 시간들을 겪는다. 나는 그 세계가 퍽 좋을 때가 있다. 눈을 떴을 때 보는 세계에서 나는 유한하고 나약하고 흔들림 있는 한 인간이지만 눈을 감았을 때 보는 세계에서는 그 한계를 깨고 훨훨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번은 하늘을 날았다. 두 팔을 활짝 펴고 빠르지만 가볍게 두 발을 구르면 이내 몸이 붕 떠서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 수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손을 두어 번 휘저으면 하늘에서 수영하듯 바람을 따라 허공을 가로질렀다. 꿈 밖 세계에서 나는 물속을 겨우 통과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지난밤에는 드디어 시간 여행을 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본 지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내 머리는 그것을 기억해 어느 날 꿈으로 재현해 주었다. 내가 이런 추측을 하는 이유는 꿈속 세계에서의 시간 여행 방법이 영화 어바웃 타임의 방법과 조금 비슷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어두운 곳에서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으면 원하는 때로 시간을 여행했다. 꿈속 세계의 나는 그와 비슷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꿈의 장면이 바뀌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시간을 여행했다는 사실에 놀라며 감았다 뜬 눈을 더욱 크고 동그랗게 떴다.


번쩍. 눈을 뜨니 스무 살이었다. 꿈 밖 세계의 나는 스물여섯 해를 살았는데 꿈속에서 시간 여행을 하여 스무 살이 되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여섯 해만큼의 경험을 거저먹고 다시 젊어진 기분은 어느 복권보다도 짜릿했다. 나는 무어라도 할 수 있고 무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무 살이 된 나는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모험들을 했다. 꿈 밖 세계에서 내가 한 번쯤 '해봤으면 좋았을걸'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누비고 다녔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무언가를 쫓아 분주히 이동했다는 사실만이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꿈속 스무 살의 나는 그 무렵에 친해진 친구들이 그리워 그들을 보러 떠났다.


번쩍.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스물두 살 쯤의 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보러 갔다. 빨리 가서 내가 지금 엄청나게 위대한 여정을 떠나고 있다고, 무려 시간을 여행하고 있다고, 그 시간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너희가 보고 싶었는지 아느냐고 말해줄 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엔 그들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있었지만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를 건넨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 눈으로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순간 무서워서 다시 눈을 감았다.


번쩍. 이번에는 다시 스무 살의 나로 돌아왔다. 분명 무엇인가가 잘못됨이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 멈춰 내가 지나온 스무 살의 내 모습과 내가 지금 바꿔놓은 스무 살의 나를 번갈아 떠올렸다. 나는 그때 만났어야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고 그때 했어야 하는 것들을 하지 못했고 그때 갔어야 하는 곳들을 가지 못했다. 내가 시간을 여행하는 바람에 과거를 다르게 살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과거와 엉키고 설킨 미래가 다 바뀐 것이었다. 나는 시간 여행으로 하고 싶은 것을 했지만 친구를 잃었다. 눈을 감기가 무서워졌다.


번쩍. 어느 순간부터 이 시간여행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기억 이 편 저 편으로 전송시켰다. 눈을 뜨니 이번에는 스물세 살 쯤의 내가 되어 있고 내 앞에는 부엌일을 하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나는 엄마를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나 이상해. 나 과거가 달라진 것 같아. 엄마 내가 또 무슨 말을 하면 미래가 바뀔까 봐 섣불리 아무 말도 못 하겠는데, 엄마 꼭 자궁 조심하고 건강 조심해야 돼."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 건강해야지. 근데 무슨 헛소리야 안 하던 말을 하고 그래?"


"몰라. 그냥 묻지 말고 꼭 건강해야 돼"


나는 그 말만을 계속 반복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거니와 문득 이 순간이 먼 미래에 엄마를 잃은 후 내가 하는 시간 여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것은 스물여섯의 내가 하는 시간 여행이 아닌 쉰몇의 혹은 예순몇의 내가 아흔몇이 된 엄마를 떠나보내고 그 시절이 그리워하는 시간 여행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엄마를 만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부디 꼭 건강하라고 전하고 싶었다.


엄마.


나는 엄마를 불렀다.


왜? 너 어제도 그러더니


엄마는 말했다.


그 사이 꿈속에선 하루가 흐른 것인지 엄마는 내게 헛소리를 이틀에 걸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는 그 핀잔이 새삼스레 일상처럼 느껴져서 다시금 엄마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상상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번쩍. 눈을 떴다. 스물여섯의 나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꿈 밖 세상에서의 깜빡임이었다. 순간 눈을 비비고 눈앞에 펼쳐진 방을 쭉 둘러봤다. 모든 것이 어제의 그대로였고 창밖 풍경도 매일 보던 것과 같았다. 잠에서 깬 나는 비로소 시간 여행이 끝났음을 안도하고 숨을 깊게 쉬었다. 밤 사이 핸드폰에는 엄마의 연락과 친구들의 연락이 도착해있었다. 꿈속에서 사라져 버린 이들이 내 곁에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긴장한 어깨를 풀며 시간 여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고되고 무서운 것임을 복기했다.


눈을 뜬 이후 꿈 밖 세계의 유한한 나는 내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먼 미래에 그것이 가능할지언정 다시는 시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새삼스레 주어진 시간이 한 번 뿐이라는 그 유한성을 떠올리며 아침을 맞이했다. 그날 아침은 유독 청명했다. 가을 아침이라 햇살이 누워 떴고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창 언저리를 밝혔다. 나는 엄마와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물었고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기원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했다. 나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을 채워 살아야 했으므로. 끝 있는 것들을 끝없는 마음으로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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