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덕:촌스러운 믿음

세상을 살게 하는 힘

by 두루주

프라하에 살며 일 년째 주기적으로 가는 곳이 있다. 자주 가면 일주일에 한 번, 적게 가면 한 달에 한 번.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그곳이 나온다. 'KOREA&JAPAN MARKET' 근방에 몇 없는 한인마트 중 하나이다. 그곳에 가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순덕이다. 그는 한인마트 사장님이다. 순덕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우연히 외국인 친구와 함께 마트를 갔다가, 친구가 그의 이름을 물어보는 바람에 알게 됐다. 1년이 넘게 얼굴을 봤는데도 나 혼자서 갈 적에는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못 했다. 한국에서 지내다 보면 이름 대신 저기요, 그..., 저...., 사장님, 여기요, 사모님, 언니, 오빠, 누나, 형, 동생으로 부르고 불렸기에 그게 익숙해진 탓이었다. 외국인 친구는 호칭을 알리가 없었다. 첫 방문에 친구는 순덕에게 이름을 물었다.


마이 네임? 에이... 촌스러운데. 마이 네임 이즈 순덕.

순덕은 자신을 소개했다.


친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촌스러워한다는 것 역시 소개받았다. 옛적 단발머리 꼬장꼬장한 얼굴에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를 입은 아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60이 넘은 지금의 순덕 역시 단발머리가 곱고 예쁘다. 순덕의 이름은 그의 말마따나 촌스러울지 몰라도 그가 밟아온 인생은 대담한 걸음들이 많았다. 김치를 사거나 라면을 사러 갈 때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프라하에 오기 전 미국에서 살았다. 그 전에는 상해에서도 머물렀다. 결혼 후, 남편이 상해에서 일을 시작하여 얼마간은 떨어져 지내다가 상해로 넘어간 것이 첫 이민이었다. 이후 미국에서 몇 년을 보내다 유럽 땅에서도 살고 싶어 프라하를 택했다. 현재는 프라하에서 한인마트를 운영 중이다. 지금이야 여행도 많이 나오고 이민도 흔해졌다지만 불과 10년, 20년 전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와... 그럼 사장님 미국에서도 계셨던 거예요? 대단하세요... 쉽지 않은 결정인데. 미국에서 또 프라하로 넘어오시고. 살던 곳을 옮긴다는 것이 막상 해보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용기가 부러워 말한다. 그럼 순덕은 답한다.


"그러게... 어떻게 했나 몰라. 근데 나는 용기 있는 사람 아니에요. 우리 남편이 너무 도전적이라서 그렇지. 나는 겁나 죽겠는데 그 사람 따라다니다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순덕은 자신의 용기를 남편에게 돌린다.


"그럼 사장님은 안 무서우셨어요? 낯선 땅에 적응하다 보면 무서울 때도 많잖아요."


"많지. 당연히.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이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안 무서운 게 아니잖아. 이걸 어쩌면 좋나 그래도 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하다 보니 또 될 때도 있고. 안 되면 어떻게 하나. 뭐 어쩔 수 없지.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또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단련되는 것 같아요."


순덕은 이어 말한다.

"이제는 그냥 이렇게 생각해요. 이거 저거 할 때는 깊게 생각 말고 그냥! 아님 말고!"


아님 말고 라고 말하는 순덕의 얼굴이 어쩐지 더욱 여유로워 보인다. '아... 그냥 아님 말고.' 속으로 그 부분을 따라 읊조린다.


"처음부터 용감한 사람 없지. 안 그래요? 다 맷집이 생기는 거지요. 하다 보면 되고. 울고 불고 하다 보면 뚝 그쳐지고. 그래도 뭐 어쩌겠어. 계속 인생은 굴러가는데. 앞으로 나아가야지 뭐. 이러다 보면 맷집이 생겨요."


그 말을 마친 후 순덕은 밝게 웃었다. 한편 순덕은 자신의 용기를 남편에게 돌리는 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안녕을 나라의 공으로 돌렸다.


"나는 한국인이라 참 다행이에요. 이게 외국 살다 보면 한국이 잘할 때 마음이 편하거든. 지금도 봐봐. 코로나 바이러스 한국이 얼마나 대처를 잘하고 있어. 아휴. 이번에 정말 한국 다시 봤어요. 잘해줘서 너무 고맙고."


이어 순덕은 말했다.


"그런 느낌이에요. 시집을 갔는데 친정이 든든한 거. 그래. 친정이 든~든 한 거지. 이래서 우리 모두가 다 잘 되어야 해. 현주 씨도 잘 되고, 현주 씨 가족들도 잘 되고, 한국도 잘 되고, 그럼 우리도 잘 되고. 현주 씨 행복이 우리 행복인 거야."


아직 결혼도 안 했건만 친정이 든든하다는 표현에 공감이 가 웃음이 터졌다.

"맞아요.(웃음) 전 잘 모르지만 알 거 같아요."


순덕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참 시간은 흘러 한 시간이 훌쩍 넘는다. 어느새 내가 집에 갈 참이면 순덕은 먹을 것을 챙겨준다. 어떤 때는 햇반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부, 저번에는 직접 볶은 깨를 건넸다.


물건을 안 사도 되니까 자주 들러서 얘기 나누고 가라는 순덕.


그는 언제나 덕을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 나의 행복은 당신 덕. 나라 덕. 남편 덕. 가족 덕. 우리 모두의 덕. 언제나 순덕의 말 끝에는 '덕분에'가 붙는다. 순덕의 행복은 모두 누군가 덕분이기 때문에 순덕은 진심으로 모두의 행복을 바란다. 나는 그것이 순덕의 삶을 이끌어준 힘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순덕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용기를 배운다.


나 가진 것 없는데 당신 덕에 행복하다는 것. 나 한 것 없는데 당신 덕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 나 용감하지 않은데 당신 덕에 용기 낸다는 것.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


이 촌스러운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내는지. 아마도 이 힘으로 순덕은 수많은 언덕을 넘어 맷집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슬슬 김치를 다 먹어가는데. 다음에는 또 무얼 주시려나. 나는 무얼 드려야 하나. 순덕의 얼굴을 보는 날이 가까워 온다. 김치를 아끼지 말고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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