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친구 사귀기가 여간 쉽지 않음을 몸소 깨닫는다. 무릇 친구란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되면 단짝이 되고 중학교를 입학할 때 되면 잠깐의 헤어짐 마저 아쉽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서먹해지다가도 대학교 졸업 소식을 같이 축하해주며 술까지 기울이다 '야 우리가 언제 이렇게 10년이 넘게 서로를 봤냐 우리는 정말 십년지기다' 하는 게 친구 아닌가. 적어도 주위에 사람 마를 날 없이 허구한 날 약속을 잡아대던 나는 그랬다.
그러다 프라하에 넘어온 나는 한순간에 고립되었다. 영상통화를 통해 만나는 친구들에게 나는 국제 왕따라 자칭했다. 프라하의 주황 지붕 속에서 동화 같은 삶을 보내지 않느냐 묻는 친구들에게, 야 말도 마 나는 친구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 줄 몰랐잖아 매번 외로워서 울상이야 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은 릴리. 릴리안나가 본명이지만 릴리라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릴리는 평소에 릴리로 불리지 못한다. 체코어의 이상한 문법 탓에 릴리를 호명할 때는 릴로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뭐 아무렴 아무리 문법이 그렇다한들 그런 문법을 알리가 없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릴리라 불렀다. 릴리는 그것이 좋다고 했다.
릴리! 멀리서부터 외치거나. 릴리! 전화 너머로 부르거나. 릴리! 자고 있는 릴리를 깨우거나. 릴리! 화장실에 있는 릴리를 부를 때도 릴리는 어느 때이건 좋으니 릴로 보다는 릴리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이든 그를 릴리라고 꿋꿋이 부른다. 체코어 문법이 중요할 게 뭐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릴리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아이돌 덕분이었다.
때는 사 개월 전, 체코어를 연습하고 싶어서 틴더 어플(소개팅 어플)의 언어 버전 같은 헬로 톡을 다운로드하고 들어갔다. 어플을 설치하면 나의 모국어와 배우고 싶은 언어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파트너 리스트를 받는다. 이후 프로필 사진과 자기소개 및 나와의 물리적 거리 등을 고려하여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대화를 나눈다. 헬로 톡의 목적은 언어교환이기에 중간중간 대화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간다 싶으면 어플 자체에서 필터를 해서 경고를 주기도 한다. 그런 장치는 모순적으로 더 적극적인 친밀감을 키울 수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릴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헬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릴리가 답을 보냈다.
어! 한국말 잘하네요!
안녕만 했을 뿐인데 나에게 릴리는 한국말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에요 ㅎㅎ
릴리가 다시 답했다.
이후 우리는 몇 살이에요, 어디 살아요, 체코는 왜 왔어요, 한국어는 왜 좋아해요 등등의 대체로 묻는 질문들을 통해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다. 릴리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그것을 안 다음부터 나를 Unni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운니...? 아! 언니! 그것을 깨닫고 나는 릴리를 동생으로 불렀다. 아! 동생!
릴리는 꽤나 소심하지만 반대로 적극적인 면도 많아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심하게 묻다가도 갑자기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그러다 결국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릴리네 집에 초대되어 그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릴리와 친해진 것이 그 아이돌 덕분이라는 것은 초대를 받은 후에 알았다.
아... 여기가 네 방이야?
조심스레 릴리가 소개해 준 가장 끝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온통 자주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약간은 어두웠다. 그 어두운 방구석에는 선반이 길게 있었는데 그 위에는 누가 봐도 장식처럼 세워 놓은 시디플레이어가 세워져 있었다. 요즘에 시디를 듣기도 하는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릴리의 취향이 시디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밑으로 시선을 내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익숙히 봐왔던 한국의 것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2학년 무렵에 많이 봤던 응원봉과 앨범들이 정성 가득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헐 응원봉!!!!!
보자마자 탄성이 나왔다. 누구의 응원봉인지는 몰라도 한국의 어느 아이돌 것임은 분명했다. 그때부터 릴리에게 응원봉의 출처와 구입 방법 및 구매 동기를 다양하게 묻기 시작했고 수줍은 릴리는 조금씩 자신의 팬심을 드러냈다.
릴리가 좋아하는 아이돌은 아스트로였다. 내가 아는 아스트로의 정보는 아스트로의 멤버 중 한 명이 차은우라는 것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아쉽게도 서로의 손뼉을 맞대며 이 멤버는 이럴 때가 너무 귀엽고 저 멤버는 랩을 너무 잘해서 심장이 아프고 다 같이 모였을 때 쏟아지는 아우라는 덕질을 끊을 수 없게 한다는 이야기들은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차은우의 미모만큼은 서로의 눈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동의했다. 어쩌면 우리의 언어교환은 수단일 뿐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은우의 미모는 생각하지도 못 한 곳에서 나를 도왔는데 그것은 릴리가 아닌 릴리의 부모님과의 일이었다. 릴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릴리네 부모님이 와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릴리네 부모님은 영어를 못 하고 체코어만 구사했다. 나 역시 체코어는 맥주 한 잔 더 주세요 정도로 하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어 공백을 웃음으로 대신 채웠다. 하하하. 하하하하. 마른 웃음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릴리 책상 위에 세워진 아스트로 달력을 보고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아스트로.
(아스트로 달력이다. 그렇지? 네도 아스트로 알아?)
나는 대충 맥락을 파악하고 답을 했다.
아노! 아노!
(네! 네!)
그러더니 릴리 엄마는 달력을 손아귀에 가져와서 한 장 두 장을 넘기고 차은우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찍힌 페이지를 펴더니 다시 책상에 놓아 말을 이었다.
네이렙쉬! 은우 은우!(네이렙쉬는 최고란 뜻의 체코 어이다.)
은우가 짱! 은우가 정말 최고야! 그렇지? 너도 동의해?
아노! 아노! 네이렙쉬!
네! 네! 동의합니다! 은우 짱!
문장이 아닌 단어로만 대화를 하려니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의성어 의태어로 우가우가 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그 상상에 빗대어 현재의 나를 보자니 웃음이 터졌다. 릴리 어머니는 내가 차은우의 미모에 감탄해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 줄 알고 더 크게 네이렙쉬를 외쳤다.
이후 릴리네 어머니는 내 곁을 계속 맴돌았다. 한 번은 파스타를 해주셔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내게 맛이 괜찮으냐 물어보셨다. 네이렙쉬 네이렙쉬! 너무 맛있어요 베스트예요 라고 외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맛있게 먹어라 아니면 기분이 좋구나 이런 말이 아닌 은우!라고 답을 했다. 이미 릴리 어머니에게는 최고=은우가 되어버려 무슨 말이든 좋으면 일단 은우를 외치는 습관이 베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릴리네 집에서 이틀 밤을 지내는 동안 잊을만하면 은우는 툭하고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여기가 체코인지 한국 어느 곳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노력에 마음이 잠겼다. 유독 내 앞에서 한국에 관한 것들을 치켜세우는 것은 진실로 한국이 좋아서도 있지만 나를 배려하는 그들의 방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은우의 얼굴이 아무리 잘나렴만 나를 환영하지 않으면 하지 못할 말들인 것을 나를 환영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릴리는 오늘도 내게 문자를 보냈다.
어떠한 코멘터리 없이 아스트로의 영상을 링크로 보낸다. 그럼 나는 그걸 확인하고 차은우가 해맑게 웃는 영상, 진진이 개구쟁이처럼 랩을 하는 영상, 그밖에 아스트로가 한데 모여 무언가를 하는 영상을 본다. 릴리는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서 자꾸만 보내고 나는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고 싶어 자꾸만 본다. 아스트로 덕에 드디어 생긴 친구를 절대 놓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링크를 누르는 밤이다. 나에게 드디어 프라하의 첫 번째 친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