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주 Sep 11. 2020

11.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어디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서식지를 옮겨도 적응할 수 있었던 능력 때문이라는 말이다. 어떤 역사적인 근거가 이를 뒷받침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인간에게는 적응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타지에 살며 몸소 느낀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아, 집이다 하는 안도감이 든다는 것, 문득 이 곳이 프라하인지 한국의 어느 곳인지 헷갈린다는 것,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같은 기본적인 말이 체코어로 자연스레 나온다는 것들이다. 그럴 때면 스스로 이제 대한체코인이네 하며 대견해한다. 하지만 늘 어딘가 불안한 구석을 숨길 수가 없는데, 이건 단지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근거 있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감정은 이 곳에 넘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쭉 자리했다. 처음에는 내가 향수병에 걸렸을 때 한국에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조금 적응을 하고 난 후에는 일이 힘들어서 일 년만 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상상을 했다. 일에 능숙해진 뒤에는 비자가 만료되면 한국에 돌아가겠구나 생각했다. 생활이 안정적으로 변한 다음에는 코로나가 터져버려, 정말 이대로 한국에 가야 될 수도 있겠구나 고민을 했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난 이후 프라하에 있는 한인민박 중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다. 한인식당을 매각한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고 교민들이 많이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자주 가는 한인마트를 방문할 때에도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휴. 한 동안 안 보이길래 말도 없이 간 줄 알았어요. 요즘 워낙 다들 많이 떠나니까. 얼굴 안 보이면 아... 갔구나 한다니까?"


그러며 뒷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라도 가게 되면, 나야 절대 현주 씨가 안 갔으면 좋겠다만, 그래도 가게 되면 꼭 얼굴 보고 인사해줘요. 안 보이면 괜히 서운하고 걱정돼."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안 가길 바라면서도 언젠가 이 아가씨도 가는 날이 오겠지 싶어 마지막 인사를 나눌 것을 당부했다. 그 당부를 들으니 정말로 이곳에서의 생활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을 품고 사는 것은 비단 사람뿐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도 달라 보이게 했다. 어느 날은 이런 풍경도 마지막인 날이 있겠지 싶다가도 또 어느 날은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고 그러다가도 언젠가는 이별할 곳이겠지 하며 애틋해지는 것이었다. 그럼 똑같은 하늘도 유난히 소중해 보이고 늘 흐르던 강물도 그날따라 빛나 보이는데 이런 감정이 싫지만은 않아서 곰곰이 내가 가진 모든 것들에 이별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실은 해외에 나온 것 자체로 나는 한국에 있는 모든 것과의 이별을 경험했다. 매일 먹는 것과의 이별 자던 곳과의 이별 보던 것과의 이별 만나던 것과의 이별. 헤어져 본 적 없는 이들과 맞이하는 첫 헤어짐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나를 감싸던 존재들이 내일 갑자기 사라진다면 나는 얼마나 절망스러울 수 있는지에 대해 가늠해보았다.


물론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면 얼굴을 보며 통화할 수 있기에 진짜 이별은 아니지만 잠깐의 물리적인 이별이 진짜 이별을 가늠하게 도운 것이었다.


존재는 부재일 때 깨달을 수 있다더니 숱한 이별을 체험하며 내가 가진 모든 것들에 비로소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별하면 너무 아플 것들을 후회 없이 사랑하기로 하고 이별하면 너무 아쉬울 것들을 후회 없이 보기로 하고 이별하면 후련해질 것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인간의 적응력은 예상외로 뛰어나 다시 이별은 없는 것이라며 나를 속이려 들지만, 이런 이별의 순기능을 알아버린 이후로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 열여섯의 이방인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