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주 Sep 22. 2020

12. 거리의 사람들(上)

어릴 때 나는 기탄 수학이나 싱크빅 국어 혹은 윤선생 영어교실 같은 학습지 구독 서비스의 수혜자였다. 엄마는 나를 학원에 보내는 대신 주마다 학습지를 풀게 했고 태생이 게으른 나는 그 배움의 기회를 종종 게으름의 표출로 써먹곤 했다. 주마다 방문하는 학습지 선생님은 그때마다 혼을 내며 게으름의 대가가 나중에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를 훈계했다. 이런 훈계는 학습지 선생님뿐 아니라 각 반의 담임 선생님들 역시 단골처럼 사용하곤 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고리타분하게 공부를 더 하면 남편이나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는 것과 (훈계 중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외모지상주의, 능력주의, 구시대적 발상, 이성애자 중심의 관점 이 모든 것들의 짬뽕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안 하면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더운 여름날 에어컨 바람을 슝슝 맞으며 잠에 드는 학생들을 보며 선생님은 교탁을 탁탁 치고 '너네 이게 귀한 줄도 모르고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땡볕에서 일한다 어서들 일어나'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 나는 직업의 세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일한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벌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2019년, 나는 밖에서 노동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 직업의 공식 명칭은 여행 가이드이다. 여행이라는 말도 멋지고 가이드라는 말은 더 멋져서 나는 이 직업에 환상을 가지고 프라하에 도착했다. 여행을 하는 직업인데 얼마나 재미있을까,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고 그들의 하루를 이끌어가는데 얼마나 짜릿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웬걸, 내가 손님을 맞이하기도 전에 먼저 만나야 했던 것은 지독한 추위와 혹독한 더위였다. 여행이라는 것에 심취해 그 여행의 대부분이 야외에서 이뤄진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스무 해 하고도 몇 년이 넘기를 실내에 익숙했던 사람인데 야외에서 몇 시간을 버티고 있자니 생각만 해도 겁이 났다. 그때서야 나를 지나쳐간 숱한 선생님들이 떠올랐고 내가 하게 된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노동임을 직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밖에 나와있는 것 만으로 체력의 많은 부분을 소진했다. 


이미 추위와 더위에 익숙해진 대표님은 투어도 투어지만 옷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특히 더위보다는 추위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며 옷을 입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새삼스레 옷 입는 법을 배웠다. 나시 위에 내복을 입고 내복 위에 또 다른 내복을 입고 그 위에 또 얇은 티를 입고, 이 과정을 다섯 차례 정도 반복하면 팔을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옷 두께가 상당해지는데 그 위에 패딩을 입어야 추위를 견딜 옷차림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렇게 털모자까지 쓰고 무장을 한 체 거리로 나갔다. 


비로소 거리의 사람이 된 것이었다.


사실 밖에서 노동하는 사람이 되어보니 그런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거리를 배경으로 일하는 자는 꽤나 많았다. 이른 아침에는 소리가 거칠게 나는 청소차를 탄 채 빛이 나는 조끼를 입은 청소부들이 거리를 닦았다.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깨끗해진 거리에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주로 프라하에서 열리는 공연을 홍보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꽤 오랜 시간 거리를 활보하기 때문에 입고 있는 옷의 두께도 나의 옷 두께만큼이나 상당했다. 그들이 공연을 알리며 전단지를 나눠주었고 그들의 홍보 덕에 어느 관객들은 음악을 들으러 갔다.


그들이 홍보를 하고 있을 때 한 켠에서는 호프 앤 호프 오프라 불리는 또 다른 홍보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프라하 시내를 오가는 관광버스를 홍보하는 사람들인데 주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버스 홍보를 했다. 파란 우산을 들고 파란 조끼를 입고선 빨간 버스로 그들을 안내했다. 


한편, 거리에는 노동하는 이들과 함께 거리에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추위를 견디기 위한 때 묻은 담요와 언제부터 길렀는지 모를 강아지 그리고 그 앞에 동전이 던져지길 바라는 깡통이나 뒤집어진 모자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나름 공식적인 자리를 갖추고 있어서 카를교를 가기 위해 지나는 골목과 카를교 입구, 다리의 중간, 카를교의 끝을 거주지 삼아 앉아 있었다. 나는 생전 노숙인과 말을 섞어본 일이 없어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괜히 겁을 먹고 잔걸음을 빨리 쳐서 이동했다. 


첫 한 달은 꼬박 야외에서 노동을 하며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차 내 일상임을 받아들였을 때 습관처럼 마주치는 거리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11.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