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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Feb 10. 2021

강아지와 서열

나는 내가 너무 인간이라서 동물 세계에서 동물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 기억이 없다. 나도 그 수많은 동물 중에 하나이면서 말이다. 물과 땅에 사는 수많은 개체 중에 어느 하나가 갑자기 다른 이들을 정복(?) 한다고 하면 너무 무섭고 기이한 일일 텐데 그 일을 인간인 나는 당연하고 번듯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다른 동물들이 내 서열을 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고 살았다. 이를 테면 강아지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우 말이다.


나의 서열을 가장 낮은 존재로 규정한(규정해주신) 강아지의 이름은 '바라'이다. 바라는 체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름으로 사람이나 강아지에 가릴 것 없이 성별이 여성이면 붙는 흔한 이름이다. 공원에서 누군가 '바라!'라고 외치면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있던 암컷 강아지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거나, 흙을 묻히며 기어가는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난다. 정확히 통계를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바라가 사람과 강아지에 구분할 것 없이 모두에게 쓰인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에서 강아지 이름이 주로 먹을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바라에게 해준다면 아마 깜짝 놀라 '감히 먹을 것으로 나를 불러' 하지 않을 듯싶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초코와 두부와 젤리와 콩과 보리가 유리, 지영이, 은정이, 선아, 현주로 불리는 상상을 한다. 유리 손! 지영이 산책 가자. 은정이 이제 그만. 간식 없어. 등의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니 조금 더 공손하게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라는 그 때문인지 내가 그 앞에서 자주 공손해지는데 이름뿐 아니라 그의 역사와 몸집 역시 꽤 유구해서 풍기는 분위기가 남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를 산 비글로 몸집은 강아지보다는 돼지에 더 가까우리 만큼 크고 두껍다. 축 늘어진 귀와 눈이 더 나이를 실감하게 하는데 아마 사람 나이로 친다면 80에 가까운 할머니일 것이다. 그래도 지팡이 한 번 안 짚고 무겁지만 힘 있는 다리를 쿵쿵 찍으며 동네를 활보하는 위력 있는 할머니였을 것이다.


바라의 세월을 함께한 사람은 하나와 톰이다. 하나와 톰은 내 친구인 얀의 엄마 아빠이다. 바라는 얀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 곁을 함께 했다. 얀의 어릴 적 사진에는 항상 지금보다 작고 귀가 덜 처진 바라가 있다. 얀이 클수록 그 옆에 있는 바라도 덩달아 커지고 조금씩 눈이 더 처진다는 것만 빼면 지금의 바라와 그때의 바라는 많은 구석이 비슷하다. 다만 지금의 바라는 새로운 식구의 서열을 가늠하고 판단하기에 충분한 역사를 지녀서 덜 웃고 덜 협조적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식구는 그가 매겨준 서열 꼴찌에 대해서 글을 쓰는 중이다. 나는 얀의 집에 꽤 자주 놀러 가는 가족 중 한 명이다. (손님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얼떨결에 초대받아서 하나의 생일파티, 톰의 생일파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요즘은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얼굴을 보러 그 집에 자주 간다. 그때마다 나는 바라에게 인사를 한다.(드린다.)


처음 인사를 했을 때 바라는 나에게 무어라 말을 했는데 내 귀에는 안타깝게도 우엉 혹은 우정 혹은 우악헝으로 들려서 이게 반갑다는 것인지 썩 꺼지라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가 다가가기 어려웠다. 다행히 얀의 도움으로 바라에게 나를 무사히 소개하고 바라의 등을 몇 번 쓰다듬을 수 있었다. 바라는 그때마다 육아에 지친 얼굴을 하고선 순순히 등을 내어주었는데 내가 귀찮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육아 대상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 바라도 한 번은 내게 먼저 관심을 보일 때가 있다. 내가 음식을 남기는 순간이 그렇다. 얀 집에 초대를 받으면 적어도 한 끼는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다 같이 둘러앉아 수프부터 스테이크를 거쳐 디저트까지 먹을 때도 있고 빵에 햄을 얹어 간단히 먹을 때도 있는데 스무 해를 넘게 밥만 먹어온 사람에게 빵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게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심지어 작은 조각 케이크까지 너무 배가 불러 도중에 포크를 자주 내려놓았다. 그때마다 바라는 귀신 같이 내 옆에 와서 울상인 얼굴로 쳐다봤다. 한 며칠을 굶은 사람이 와서 이 불쌍한 자를 도와주지 않겠나... 하고 말하는 간절함으로 눈망울을 촉촉이 적신다. 나는 그 눈망울에 넘어가 남은 스테이크 조각이나 덤플링 몇 개를 떼어준다. 그때가 유일하게 바라와 내가 쌍방으로 호의적인 순간이다. 혹시라도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날에는 일말의 관심 조차 받을 수 없다.


다 같이 산책을 할 때는 그 서열의 표현이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종종 식사를 마치고 집 근처로 산책을 하러 갔다. 하나와 톰 그리고 얀과 바라와 내가 함께 걷는다. 바라는 강아지가 하는 행동들을 보여주며 걷는다. 땅 냄새를 맡고 나무마다 멈춰서 조금씩 소변을 본다. 나무마다 멈춰서 소변을 보지 않는 인간은 보폭이 크고 빨리 걷는다. 그러면 종종 바라가 저 뒤에서 천천히 쫓아올 때가 많다. 그때마다 톰과 하나가 바라를 크게 부르는데 그 소리를 듣고 바라는 고개를 들어 맡던 땅의 냄새를 거두고 힘차게 달려온다. 어느 날은 나도 용기를 내어 바라를 불렀다가 호되게 무시를 당했다. 내가 아무리 비슷한 톤과 음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목소리를 따라 해 불러도 바라는 하나와 톰의 부름에만 달려왔다.


나는 바라의 세계에서 두 발로 걷는 동물 중 서열 꼴찌일지도 모른다. 나는 바라가 정해준 서열을 눈치채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바라를 만난 것이 8개월 전쯤이었는데 최근에서야 그 서열을 인정하고 바라를 모시기 시작했다. 내가 동물에게 서열이 매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나는 8개월 간 납득가지 않는 나의 위치를 부정하며 바라 등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마치 내가 바라의 주인이라도 될 수 있는 양 말이다. 누가 내 등을 계속 만지며 나를 귀찮게 한다면 나는 팔을 물어버렸을 텐데 바라의 인내심에 고마울 따름이다.


모든 동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이 되지 못한다. 이 주인 노릇은 다행히 인간들 사이에서는 많이 사라졌다. 법적으로 노예제도를 합법화하는 나라보다 금지하는 나라가 더 많으며 그것이 비윤리적임을 안다. 이제 인간은 동물의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얼마나 유지할 것인지, 너무 당연히 누리는 서열 일위로서의 권력이 줄어드는 날이 올진 모르겠다. 동물 세계에서 서열이 낮아지는 경험이란 우리가 우주여행을 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힘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서열이 낮아지기 전에 먼저 우주여행을 경험하고 외계인과의 만남을 조우하는 것이 역사에 먼저 등장할 수 있겠다. 그 외계인이 우리를 반려동물로 키우거나 도축하여 식재료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때 동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무시무시한 서열의 세계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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