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루주 Nov 13. 2020

고민의 세계(부제:죽어가며 산다는 것)

고민의 세계는 참 웃기다. 고민에겐 상대성이 중요하다. 무엇이든 작은 무게의 고민들은 상대적으로 큰 것을 만나면 이내 그 무게를 잃고 먼지처럼 털레털레 공중에서 흩어지고 만다. 요즘 내겐 여러 가지의 고민이 복합적으로 일어나지만 죽음에 대한 고민 앞에서 무수히 많은 고민들은 그저 하나의 점처럼 보일 뿐이다. 놀라지 말라. 죽음에 대한 고민이 지금 당장 죽을 고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내 삶에는 누군가를 축복하러 가는 식장보다 누군가를 추모하러 가는 식장의 기억이 더 많다. 첫 번째 기억은 중학생 무렵이었다.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던 삼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해 돌아가셨다. 나는 양푼 가득 회와 야채를 넣고 초장을 듬뿍 짜서 시뻘겋게 양념된 회덮비빔밥을 한 숟갈 뜰 참에 그 소식을 접했다. 입에 씹히는 물컹한 회의 촉감이 역했다. 그 자리에서 입에 있는 밥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 하고 눈물을 흘렸었다. 삼촌의 선택과 그에 대한 뒷 이야기는 어른들의 것이라며 듣지 못했다. 나는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을 접하고 나는 일기를 썼다. 기대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떠나는 이가, 그리고 그 생명을 스스로 끊은 이가, 살아생전에 무엇을 고민했을지, 어떤 생각을 했을 지에 대해 상상을 하며 처음으로 삶과 죽음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흐려질 무렵 또다시 다른 이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 사람은 입버릇처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학부생이었을 무렵, 학생회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과 회장 오빠였다. 그 오빠는 학생회관에 들어서 복도에 걸어갈 때 나를 발견하면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멀리서부터 곰 한 마리가 걸어오는 듯 한 인상이 늘 풍겼다. 그런 인상은 덩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딘가 늘 혼자 쓰고 외로운 싸움을 하는 듯 보였는데, 그 이유가 경제적인 상황 때문이라고 건너 건너 전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술을 먹고 또 절반 정도는 해장을 하며 보냈다. 그 오빠는 입버릇처럼 육개장을 먹고 가라고 했다. 곧 죽을지 모르니 장례식에 와서 육개장을 먹고 가라는 소리를 그렇게 농담처럼 했다. 그러면 나랑 언니들은 등짝을 때리며 말이라도 그런 소리 말라며 또 다치 농담처럼 웃고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오빠가 죽었으니 검은 옷을 입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 축제를 마친 후 삼일쯤 지난날이었다. 나는 삼 일 전 그 오빠랑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축제 주점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투터운 손을 잡고 악수를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다. 분명 웃으며 그렇게 헤어졌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됐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육개장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육개장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이는 나뿐이 아니었는데, 온 식장에 앉아 있는 이들이 기껏해야 스물 다섯 스물 여섯인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광경을 상주가 된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봤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엔 장례식장에서 웃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친척들은 '좋게 돌아가셨다'며 웃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친척이 숨어 있는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면 웃음을 보일 수 있는 죽음이 따로 있는가를 두고 고민을 했었다. 당시는 참 아리송했는데 나중에 내가 보고 들은 죽음이 많아질수록, 그런 죽음이 더 처참할수록, 그 죽음의 안타까움이 더 길게 갈수록 친척들의 웃음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회장 오빠의 식장에서는 아무도 웃는 이가 없었다. 그것이 추모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를 더 실감 나게 만들었다.


죽음이란 다음이 없는 것이구나. 기약할 내일이 없는 것이구나. 오늘 건네는 인사가 마지막이 되는 것이구나.


삼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을 사진 속에서 보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은 흐려질만한 하면 어떤 형태로든 찾아와 나 역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갔다. 이후로 삼사 년 정도가 지났는데 죽음을 고민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진해졌다. 유명인들의 극단적 선택, 사고사, 가깝고 먼 친지들의 이야기들은 죽음에 대한 소식을 싣고 자주 도착한다. 그럴 때면 침묵을 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연유로 이제 내 고민의 세계에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방송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인터뷰 한 특수 청소부의 영상을 봤다. 그분은 돌아가신 분의 집을 청소하는 일을 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의 사후 현장을 목격하신다고 했다. 그러며 청소를 하다 보면 많은 일들을 겪는다고 하셨다. 그중에서 울컥 화가 치솟을 때가 있다며 전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집 청소를 하다 보면 돌아가신 분들의 집에 한 번도 안 쓰고 쌓아놓은 물건들이 그렇게나 많다며, 양말이나 다른 것들은 구멍이 날 때까지 신으면서 그렇게 물건을 아끼고 한 번도 안 쓰고 보관해놓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럴 때는 울화통에 청소하며 혼잣말을 한다고 전했다. '아휴 그냥 이거 쓰지. 아휴 왜 이렇게 아끼고 그런다고. 좀 그냥 쓰면서 살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인생은 참 잠깐일 수 있는데. 그다음이 없을 수도 있는데. 지금 당장을 너무 희생하다간 그것에 보답이 돌아오는 날에는 내가 없을 수도 있는데. 나도 안타까워 같이 울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 인터뷰 영상은 계속 흘러갔다.


영상 속 진행자 조세호는 특수 청소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수많은 죽음을 보셨는데, 일을 하면서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그러지는 않으셨나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생명의 소중함이라기보다는... 인생이 참 덧없다. 이런 것을 많이 느껴요. 참 허무하다. 덧없다."


그러며 많은 생각이 담긴 눈으로 허공을 잠시 쳐다보셨다.


영상을 끄고 가만히 앉아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내 주변인들의 죽음, 내 가족들의 죽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내가 모르는 이들의 죽음. 세상의 모든 죽음들을 떠올렸다. 그러며 죽음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아지는지, 모순적으로 그렇기에 어떤 용기를 내릴 수 있는지, 어떤 결단을 행할 수 있는지, 어떤 억울함은 그치고, 어떤 마음은 베풀 것인지 많은 것들을 돌이켜 보았다. 당장 더 사랑하고 베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럼에도 삶은 질기기에 자꾸만 죽음에 대한 실감을 흐리게 만든다. 확률로만 따지만 내일 죽을 확률이 내일 살 확률보다 압도적으로 낮아, 삶의 연장선에서 작은 고민들을 유쾌하게 반복한다.  이 고민의 경중을 파도 타며 표현할 마음과 내일을 위해 다치지 않을 마음, 써야 할 물건과 내일을 위해 아껴야 할 물건을 나눠 담고 보관한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으나 생과 사가 함께 세계인 이상, 이런 고민을 하며 보낼 듯하다. 매일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후회 없는 삶인가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후회 없이 마음을 표현했는지, 내 마음에 솔직하며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억울하게 참아가는 것은 없는지, 쓰지도 않는 것을 애지중지 아끼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오늘 주어진 삶에 충분히 감사하며 누리고 있는지. 이것이 내 고민의 세계의 가장 무겁고 중요한 별이다. 이 우주 속 크고 작은 별들을 잘 끌어안으며 천천히 죽어가고 살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청소부로 일하는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