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떠나야 알게 되는 것들

by 김작가

여행은 집으로 돌아갈 핑계를 찾기 위해 한번 나가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뭐 때문에 멀리 나간대?”<슬픈 세상의 기쁜 말> 중에서 by 정혜윤


부픈 가슴이 주체가 안 돼서 멀리 가급적 멀리 훨훨 날아가고 싶던 그 시절, 스무 살엔 그랬다. 어려서 가족여행은 해 본 적이 없다. 부모님은 농사꾼이셨는데 사철 내내 논과 밭에서 수고를 다하는 것을 숙명이라 여기셨는지 일 이외의 삶은 몰랐다. 사춘기였을 때는 일하는 게 귀찮아 비 오는 주말이 휴식이라 그런 날씨를 주라고 신께 기도도 해봤다. 어느 생명체도 사회화라는 과정이 있다. 고등학교는 도시에서 다녔다. 대학은 도시를 떠나 더 멀리 가고 싶었다. 울타리를 벗어난 강아지처럼 그저 달음질치고 어미에게서 떨어져 독립하고 싶었다. 부모는 자주 집안 농사일을 시켰고, 자식들에게서 부족한 일손을 메꿨다. 노동력은 메꿨지만, 자식들의 허기진 마음을 메꾸는 건 잘 모르셨다. 그들은 그 나름대로 최선이었을테다.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게 가장 큰 책임이라고만 여기던 시절을 살아오셨으니까 말이다.



결혼을 했다. 한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고향에서 차로 300킬로 이상의 거리에 시집와서 살고 있다. 그 시절이 어느덧 이십여 년이 돼간다. 흐르는 물리적 시간만큼 새로운 터전에 적응해가고, 그사이 내 아이도 훌쩍 성장했다. 괜찮을지 알았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 고향은 북한에 있지도 않고 언제든 갈 수 있다. 이곳에 살면서 자주 고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딸려오는 추억의 냄새가 그립다. 여행을 다녀온 누구에게서 그곳을 방문한 이야기나 변한 작은 도심에 대한 것들과 여러 소식들에도 그저 내 귀는 반가울 뿐이다. 아직 어머니와 언니들이 그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주변인들은 코로나 시국에 고향에 가고 싶어도 비행기를 타야 하니 못 나갈 할 타국도 아닌데 뭐가 그리 어렵냐고 말하겠다. 하지만 현실에 발이 묶인 자는 결코 발이 자유롭지 못하다. 꿈이라는 말은 허상이고, 결코 가 닿지 못하는 것인가 싶다. 이사는 내게 꿈이다. 주부로 살면서 자발적으로 내 삶을 선택하지 못하는 삶에 익숙해졌다. 가족들의 생활이 당연히 이곳에서 수월한 데 이기적인 엄마가 되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조금 더 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내 삶 역시 유한함을 잊은 건 아닐까. 용기란 녀석은 집을 나갔고, 불안과 주저함만이 나를 독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너는 누구니 하고 물어본다. 나를 만든 팔 할의 환경이 친구들에 비해 너무 작고 빛나지 않아서 받은 것이 없다며 모든 것을 내젓고 그 이후엔 남은 또 나의 2할로 살아가려 애써봤지만 진정한 내가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아 혼란스러웠다. 가면을 쓰는 게 당연한 일인지 익숙지 않다 여전히. 2할의 내 모습도 나인데 말이다. 내 성정의 팔 할을 말하자면 이렇다. 책을 매일 읽어도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그때 만들어진 나다. 돈을 주고 교육받은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레 호흡하며 몸에 밴 학습은 유년의 경험이 아닌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벗 삼아 한 시간씩 걸었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꽤 큰 내발은 그 당시 나를 환경에 적합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걷는 게 힘든 일인지는 몰랐지만 더위와 추위는 싫었다. 학교와 집의 먼 거리 때문에 걷고 또 걸어가는 등굣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없었을 땐 혼자 이야기를 엮어내며 공상에 빠지기 일쑤였고 눈은 주변의 환경을 관찰했다.그런 시간은 내 마음을 풍족하게 했던 것 같다. 방학 일기를 쓰면 어김없이 상장은 따라오는 보상이었다. 그땐 꿈이 소설가였을 정도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여전히 내 모습이 크고 빛나지 않아도 너를 더 사랑해주면 안 돼? 책과 글을 사랑하는 네가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인걸. 너만의 그런 모습이 바로 너야. 어쩌면 네가 살았던 그 삶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었던 유년 , 요즘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그런 한적하고, 사색이 가능한 삶 말이야. 전원(田園)의 삶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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