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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Jun 11. 2022

쉼표는 다르다.

텃밭 가꾸기

  자발적 쉼을 선택했고, 어딘가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작년에 일을 쉬게 되면서 텃밭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집 근처 지인의 묵힌 땅을 거저 사용하라 하셔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먼저 빈 땅을 채우고 싶었다.   동네 오일장에 가서 봄에 나오는 모종들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고추, 오이, 가지뿐만 아니라 참외, 수박등 등 욕심껏  한데 담아왔다.  돈을 주고 밭 관리기를 빌려서 밭을 갈고 돌도 골라내고 땅을 쓰기 좋게 정리를 했다.  풀만 무성하던 땅을 손질하고 나자  낯이 뽀얀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부터 화장을 시작해도 될 듯 좋은 기초가 만들어졌다. 주인이 황토흙을 넣어놔서 흙도 포슬포슬해서 더욱 마음이 좋았다. 밭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덮었다. 비닐을 덮어두면 풀이 양껏 자라지 못한다고 주위에서 알려준다. 사온 모종들을  심고 물을 주고 나니 마음이 흡족했다. 작년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들을 심었고, 갈 때마다 꽃이 폈는지, 열매가 맺혔는지, 잡초가 자라 작물들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이따금이 아니라 자주 들러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그중 몇 포기는 꽃이 피기도 전에 말라죽거나 벌레 약을 뿌리지 않고 경작을 시작해서인지 케일, 참외, 수박 비롯해  많은 채소들을 벌레와 나누다 보니 정작 수고한 우리 입에 들어갈 잉여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장마도 한 몫을 했고, 다 익은 토마토는 연방 터지기 일쑤였다.   농사지식이 부족했던 탓, 수확이 안되면 속상해야 하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내 시간과 정성을 쏟을 곳이 필요했고 여러 계절 내 마음의 짐을 충분히 부려놓았고 나를 받아 준 곳이 그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전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쉼이 필요했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두고 번아웃이 왔다고 한다. 번아웃은 심신이 지친 상태라는데, 십 년 넘게 쉼 없이 일하며 육아했는데, 경제적으로 크게 나아진 게 없었고 오히려 정신은 고갈된 상태라 일에 몰두하기가 싫어졌다.  이런 사람에게 큰 정원은 이미 너무 가꿔져 있고 아름다운 것들만 심어야 될듯하다. 오히려  텃밭은 골고루 이쁜 것보다는 못생겼지만 쓰임새가 좋은 야채들이 많다. 감자는 감자대로,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파는 파대로, 못났지만, 쓰임새는 가지각색이고 밥상을 풍족하게 만드니 더욱 좋다.  잡초를 핑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여름엔 아침일찍이나 오후 늦게  밭을 찾아가 물을 주고, 또 호미 들고 쪼그려 김을 메기도 하면서  여러 계절을 보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작물들이 자란다는 말을 머리에 되뇌면서 자주 내 새끼를 보러 오는 어미의 마음이 되었다.

  글쓰기 수업에 올해 참여하고 있다.  책이 나오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시던 선생님께서는  글자크기나 여백이 주는 의미를  환기시키셨다. 여백이 없는 글은 독자에게 환대를 받지 못한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책을 폈을   소제목 아래 큼지막한 공간들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없다면 이미 마음에 새것을 들일 자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는 주로 일정을 채워가려 애쓰기 쉽다. 새해 계획을 세울 때는 더욱이 그렇다. 그보다좋지 않은 습관 같은 것을 도려내고 나면 자연히  시간이나 공간이 나온다. 그곳은 여백으로 비워두는 것도 삶에 지혜가 아닐까 싶다. 일생을 누가누가 바쁘게 살았냐로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보다 얼마나 스스로 만족할  있는 ,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았느냐가 여하리라. 여백 없이 달려가는 이들에게 신은 브레이크를   있다.   천천히 앞뒤 좌우 보고 가라고.  쉼표는 마침표와 다르는  모르지 않은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면 시작하고  쉼표를 발판으로 그저 나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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