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는 자주 짤막하게 꿈속을 여행했다. 가끔 어느 게 현실인지 꿈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지난 생 익숙했던 목소리와 분위기가 떠오를 듯 말 듯해 따라가 본다. 보리는 코를 벌름거린다. 시멘트 냄새. 젖은 흙과 녹슨 철근, 땀이 찌든 작업복 냄새. 어느 도시의 큰 아파트 공사장 앞에 선 낯익은 중년의 남자.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본다. 굳은살이 단단하고 거친 손바닥에 손톱밑에는 회백색의 시멘트 가루가 끼어있다. 이어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어이, 강 씨, 이쪽 시멘트가 덜 칠해졌는데.”
“거기 내 말 안 들려?”
“오늘 안 끝나면 내일 나오지 마.”
그의 하루는 비슷하게도 그런 말들로 시작해 그런 말들로 끝났다. 작은 도시는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늘 자신의 손에 남는 것은 넉넉지 않아 삶이 고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늘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 벌이를 하며 부모에게 기대지 못했다. 새로 올라가는 건물의 벽을 바르면서도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가끔은 밥보다 소주가 먼저 들어가기도 했다. 속을 채운다기보다는, 속을 눌러두기 위해서였다. 집에는 식구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 아들은 어려서부터 개를 좋아했다. 길에서 만나는 개들을 보면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아빠, 우리도 개 키우면 안 돼?”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건 삶의 여유가 어느 정도는 필요한 사람의 몫이란 걸 알았다. 보리는 새로운 냄새의 자극으로 다시 코를 벌름거린다. 흙냄새, 풀냄새, 보리는 꿈속에서 네 발로 서 있었다. 말은 사라졌고, 몸은 가벼워졌지만, 외로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 곁을 맴돌았다. 이번 생은 말로 상처받는 일은 적겠구나 생각했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말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보리는 지난번 자신을 데려 간 대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뭐라고! 너 까짓것을 괜히 데려와서는!.”
젊은 여자는 보리를 노려보며 악다구니를썼다. 개동영상을 상업적으로 악용하던 대여자들에게 욕설의 댓글들이 달리자 쏟아낸 말들이었다. 차갑게 식은 보리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그리고 나직히 말했다. 쉬운 삶은 없구나.
지영은 외출하려 나갔다가 일층에서 멈춰 섰다. 아파트 앞 커뮤니터 센터 앞에서 천막이 쳐있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지영은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가보는데 지나가는 노부부는 고개를 뒤로 돌려 천막 쪽을 힐끔거리고 수군거렸다. 천막 앞에는 ㅁ펫렌털업체의 이름이 써진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샛노란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 둘은 한 손엔 업체 홍보지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중이었다. 천막 안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자신도 이전에 본 비슷한 홍보 영상이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ㅁ펫렌털 업체에서 홍보를 나온 것 같았다.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온 엄마와 아빠들도 있었고, 그들을 놓칠세라 옆에 찰싹 붙어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보였다.
영업사원들이 나눠 준 전단지를 들여다보는 부모들 옆에 아이들이 부모를 채근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엄마, 강아지 우리도 사자. 내 친구 진우 알지? 걔도 강아지랑 매일 논다고 자랑해. 응?"
옆에 있던 안경 쓴 아이가 말했다.
" 바보야 사는 거 아니거든. 우리 엄마가 나도 강아지 빌려준데, 생일선물로."
지영은 상가마트에 들렀다가, 평소 이 동네 소식은 모르는 게 없는 여사장이 펫 렌털업체 통해 아파트 입대위 회장이 뒷돈을 받았을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는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