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유아기에 이루어지는 생애 초기 교육이 갖는 중요성은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는 수단이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혹여 선입견이나 편견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아닐지 의구심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위인들의 영유아기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과연 그들 전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을 받으며 중요한 경험을 했을까? 누군가가 갈등 상황을 어떻게 언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으며, 평상시에 자연과 친숙하며 마음껏 뛰어놀았는지, 수나 언어, 예술 등 다양한 부분에서 고른 경험을 했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만약 전쟁 상황 속에서 영유아기를 보냈다면?
반대로, 우리 사회의 범죄자들은 모두 불행하고도 부적절한 영유아기를 보냈을까? 부모 또는 온전한 주양육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들은 전부 불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변화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말인가?
아이들이 마땅히 경험하고, 배워야 할 것들을 반드시 인위적으로 제공하고 마련해주어야만 발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루소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들은 자연 그대로, 스스로 잘 자랄 힘을 갖고 태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른들이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어린 시절에 불행한 일이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의 삶도 무조건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
어디가 조금 아팠다고 해서, 가정환경이 조금 온전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아이가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는 불행하게 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섣불리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러한 선입견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나 또한 흠칫 놀랄 때가 있어서 늘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혼낼 때가 많다.
인간의 삶이란 정말 복잡하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다수의 생각과 경험을 표준으로 여기며 아이들을 대하고, 사람들을 대한다. 세상에 꼭 이것만이 맞으며, 꼭 당연한 수순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교육은 오로지 '그 아이'만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결론도 짓지 않고,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으면서 항상 가능성만을 내다보며 다가가야 한다. 교사든, 부모든, 친척들이든, 주변 이웃이든, 아이 스스로든 어느 누군가가 어떠한 잘못을 했다고 해서 그 아이의 인생이 반드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환경을 해쳐나갈 줄 알고, 스스로 즐겨하는 것을 찾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