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면서 치유받기_6탄
때는 바야흐로 2003년 5월
대학 생활의 활력소 오늘은 동아리 MT날
여중, 여고, 여대까지 소녀소녀한 감성과는 거리가 먼 선머슴같은 아이들 사이에 지긋지긋함을 느끼던 우리에게 연합 MT는 공식적으로 여자여자 하며 살짝의 일탈을 꿈꿔볼 수 있는 수능시험을 치룬 날 같았다!
학교 앞을 기다리는 수 많은 남정네들 사이에 내 짝이 없어도 세상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
우리에게 장소나 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같이 가는 학교가 어디인지도...
어떤 학교의 학생들과 일정을 맞추는지에 따라 선배의 능력치가 인정받는 순간이 바로 지금!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가 떠나기로 한 그날까지
안타깝게도 상대를 찾지 못했고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현지 조달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무작정 대학교 MT촌의 성지 강촌으로 향했다!
깔깔깔 여자 셋만 모여도 접시가 깨진다는데 10명이 넘는 여자들이 모여 한 마디씩만 거들어도
MT촌 전체가 흔들흔들할 지경이었다!
소주를 박스채 들고가는 남녀공학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조용히 소주에 오렌지가루를 섞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즐겁지 않아보였던 후배 무리들의 쓸쓸함을 못본 채 할 수 없어 선배인 내가 나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종이컵에 따른 오랜지 맛 소주 한 잔을 거하게 들이키고 녹색병 하나를 주머니에 챙긴 다음 약간의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 밖을 나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때 눈 앞에 들어온 맞은 편 숙소 문 앞에 붙여진 흰 종이
가까이서 보니 [컴퓨터공학과 모임]이라고 쓰여있다.
문 앞에서 살짝 숨을 고르고 기운차게 방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기대한 바와 같이 그 방엔 온통 시커먼 남정네들이 수두룩했는데 약간 분위기가 애매모호하다...
터울이 많이 지는 친 오빠 방에서 느낄 수 있었던 홀아비 냄새가 이미 온 방에 퍼져 있는 것도 그렇고 방문을 열어준 그의 무지개색 발가락양말을 보는 순간 뭔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문 안으로 들어섰기에 다시 돌아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복학생 몇 명이 끼어 있는 것이겠거니 애써 불안함을 감추고 야심차게 자기 소개를 시작하며 술 한잔씩을 돌리고 원래 의도했던 바를 열심히 피력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어 우리 숙소로 초대해 그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는데 음...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
03학번 신입생 후배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 남성분들의 평균 학번은 94학번, 거기에 알고보니 컴공과 학생 MT가 아니라 IT기업의 부서 워크샵이었던 것!
그들만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고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숙소 밖을 넘어갈무렵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이들의 눈을 마주하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조용히 그 분들을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어르신들과의 건하함을 모두 내죄요 하면서 시간을 보낸 다음 겨우 진정된 마음으로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중 신발장에 놓여있던 운동화에 쪽지 하나가 살포시 얹혀져 있다!
지금 기분 같아선 꾸겨서 혹은 찢어서 버려도 시원찮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용기내는 마음으로 살포시 접혀 있는 메모지를 펼쳐보니
"심심하시면 아래 번호로 연락주세요"
"016-xxx-xxxx"
번호가 적혀있었다!
일련의 전쟁을 겪은 이후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후배가 이번에는 직접 나서보겠노라며 용기내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넘어 통화음이 2~3번 정도 울리고 나니 바로
"여보세요?!"
하며 굵은 남정네 목소리가 들렸다!
후배는
"신발장에 놓고 가신 쪽지 보고 연락 드려요."라며
최대한 여성스러우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수화기를 든 앳되보이는 남자 아이 한 명이 서있었다! 알고보니 맞은편 숙소에 놀러온 아이들이었는데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 노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랑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지는 바람에 연락처를 남겨놓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그 친두들 무리 몇과 우리는 처음과 달리 아주 즐거운 시간을 얼마간 보내고 있을 무렵 웃음 소리가 바깥을 향해 울려퍼지는 순간 그 아이에게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는데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성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재미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싶었지만 급한 용무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술자리를 슬슬 마무리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 아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한 걸 못참는 우리들이 술도 마셨겠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을리가 없지! 밖으로 나가보니 우리랑 신나게 놀던 무리들이 한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전후사정을 살펴보니 공대생들인데 같이 온 여자 아이가 잠깐 쉬는 시간을 갖는 사이에 남자 동기들이 한 둘씩 밖으로 나와 우리 숙소로 오면서 같이 온 친구들이 어디를 갔는지 찾던 중 화기애애한 상황을 눈으로 접하고는 서운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려버린 것
그 여자 아이를 달래주던 남자 아이가 혼자서는 버거웠는지 우리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남겼던 아이에게 사태 수습을 위해 전화를 했던 것
뭐 그런걸로 울 일인가 같이 놀면 되지 하며 우리는 툴툴거리며 방에 들어왔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랑 같이 놀던 남자 아이들 중에 그 여자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던 모양
우리가 마치 그 아이를 불러낸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뭐 어쩌겠냐 그냥 이불 위에 몸을 누이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나둘씩 잠에 들었다.
그리고는 몇십분이 흘렀을까...
휴대폰에 띵똥 하면서 문자가 한 통 왔다.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
뭐지 하면서 보니
"저 아까 같이 이야기 나누던 철호인데 갑자기 나오게 되서 죄송하네요. 괜찮으시면 잠깐 지금 밖에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생각해보니 아까 그 친구들 중에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며 내 전화를 빌려달라길래 아무 생각 없이 손에 쥐어줬는데 그 때 번호를 지우지 않은 모양이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난 잠들어 있는 후배들의 이불을 잘 덮어주고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그 아이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저만치 서있다.
"저... 무슨 일이신지..."
"죄송해요~ 동기랑 같이 왔는데 살짝 오해가 생겨서..."
"아니에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 아이가 내게 용기를 담은 굵직하지만 짧은 목소리로
"혹시... 저 서울 올라가게되면 한 번 연락 드려도 될까요? 아까 제가 표현은 못했지만 첫인상 느낌이 너무 좋아서 좀 더 연락하고 지내고 싶은데..."
"저... 남자친구 있으시면 그냥 친구로 지내도 좋을 것 같은데..."
사실 살짝 살짝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웃음도 나누긴 했지만 장소와 시간이 그런만큼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그게 긍정적인 시그널이라고 생각되었나보다.
친구로 지내는 것이 나쁠 것 같지도 않고 마땅히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거나 누굴 만나고 있던 것이 아닌터라 잠시 생각하는 척 뜸을 들이고는
"아... 예~ 그래요! 연락하고 지내요."
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 뭔가 원하는 방향의 대답이 아니었던건지 어니면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건지 깊은 한숨과 함께
"아... 저 연락 드리는게 혹시 실례인데 예의상 대답해주시는거면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편하게 말씀 해주세요."
라며 한 발 물러서는 듯한 늬앙스를 풍기는 것이 아닌가...
앗. 이게 원하는 방향은 아닌데 하며 난
"아, 그게 아니라 저 사실 이런 상황 처음이라 지금 엄청 떨리고 설레는데 너무 적극적인 자세로 바로 대답하면 뭔가 좀..."
하며 말끗을 흐리며 그 아이 얼굴을 살며시 올려다 보았는데 그 때 그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자주 연락해요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아... 네"
하며 난 수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우리는 얼마간의 이야기를 좀 더 나눈 이후에 서로의 숙소로 돌아가고 다음날 MT촌을 떠날 때도 눈인사를 나누며 청량리 역에서 첫 만남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5월의 따뜻한 햇살 좋았던 날 내게 첫 사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