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ore 배터리

더 이상 충전물은 사양한다

by 우주속의 먼지

휴대폰, 태블릿, 헤드폰, 노트북, 전자책, 칫솔살균기, 목마사지기, 눈마사지기, 블루투스스피커, 휴대용 랜턴, 카메라, 폰사진인화기...


미니 5핀, 5핀, 8핀, c타입.... 이름도 잘 모르는 타입의 케이블들이 넘쳐난다. 대체로 지금은 잘 안 쓰는 것들이다. 그러나 기계가 있기 때문에 버리지는 못하고 박스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대체로 c타입으로 통일되는 것 같긴 한데, 새로운 기계에 늘 캐이블이 동봉되더라도 기존의 c타입 케이블을 같이 쓰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아이러니하게도 c타입 (새) 케이블이 가장 많이 싸여간다.


배터리가 주는 달콤함을 맛보았을 때가 있다. 아마도 그 최초의 맛은 휴대폰이지 않았을까. 건전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되고 잘 때 한 번씩만 꽂아두면 하루종일 무선으로 쓸 수 있는 만능기계. 전기가 없는 곳에서도 전자제품을 쓸 수 있는 것은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전선에서 해방된 삶은 혁명적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의 달콤함은 아무래도 휴대폰, 노트북, 카메라 정도에서 절정을 찍고 내려온 것 같다. 모든 것이 과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충전식 물건도 그 한편을 차지한다.


헤드폰을 집어서 산책을 나갔는데 십분 정도 뒤에 ‘플리즈 리챠지 더 배터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꺼져버렸다. 오랜만에 집어든 블루투스 스피커는 너무 안 썼더니 배터리가 거의 방전되어 이제 케이블 없이는 거의 작동하지 못한다. 눈을 마사지하는데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느낌이 들면 역시나 배터리이다.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버렸는데 다음날 눈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15프로밖에 남지 않은 태블릿을 충전시키는 것이었다.


잔디밭 위에서 노트북을 열던 멋진 디지털유목민은 사라지고 지금은 배터리의 노예가 되었다. 자기 전에는 어떤 아이를 충전해야 할지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충전해야 할지 방을 스캔한다. 기기마다 선을 주렁주렁 달기 싫어 한 두 개의 케이블로 해결하다 보면 그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도 일이다. 핸드폰이 50프로 남았는데 태블릿이 20프로 남았을 경우 오늘 내가 무엇을 어디에서 쓸 것인가를 생각한다. 가끔 둘 다 쓰고 싶은데 외출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태블릿을 꽂아두고 그 근처에서 핸드폰을 하는 합의점을 찾기도 한다. 갑자기 목이 아플 경우를 대비해 목 마사지기가 배터리가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두는 것도 배터리관리 루틴 중의 하나이다.


이제 생각한다. 내 인생에 더 이상 추가적인 배터리는 없어야겠다. 그래야 이 노예 생활도 이 즘에서 멈출 것 같다. 그 일환으로 한 가지 고집하고 있는 것은 청소기이다. 십 년도 더 된 유선 청소기로 아직까지 선에 선을 연결해 가며 이방 저 방 넘나 든다. 코드선을 연결하거나 정리하는 것이 좀 번거롭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파워는 남부럽지 않다. 그리고 먼지통을 비우는 것 외에 크게 관리할 것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이 청소기는 나에게 특별한 안정감을 준다. 아마도 이 물건이 가진 단순함과 견고함, 그리고 오래됨을 내가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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