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피아노

나의 첫 음악

by 우주속의 먼지

며칠 째 머리에 맴돌던 음악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 정말 답답하다. 가사라도 있는 음악이면 가사를 검색하면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음악은 힌트를 줄 것이 없다. 가끔 떠오르는 음악의 계이름을 넣고 찾아달라고 할 때 찰떡같이 찾아주는 네이버 지식인을 본 적은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계이름으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리듬만 적어도 음악을 찾아준다는 신기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어느 사이트 ‘음악 찾기’에도 올려두었으나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꽤 예전 음악이고 한때 많이 유행했는데, 뉴에이지 피아노곡인가 싶어서 유명했던 음악을 다 들어보아도 맞는 음악이 안 나온다. 그 와중에 음악들은 왜 이리 좋은지, 잠시 옛날 감상에 빠져 음악 찾기는 느리게 흘러갔다. 조지 윈스턴, 앙드레 가뇽, 이사오 사사키, 김광민, 이루마, 유키구라모토.... 학교 다닐 때 피아노가 있는 체육관이나 음악실에 가면 한 번씩 뚱땅거리던 그때 그 곡들. 그때 그런 곡들이 어쩌다 단체로 유행했을까.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재미없게 치던 하농이나 체르니는 치면서도 이게 뭔가 싶었다. 손가락 운동, 스케일 훈련을 하고 나면 곡다운 곡을 친다고 치는 것이 소나티네, 모차르트, 바흐인벤션... 지금 들으면 귀가 씻기는 듯한 청량한 음악들이지만 그땐 뭐 이리 지루한 걸 자꾸 치라고 하나 싶었다. 멜로디를 아무리 들어도 흥이 나지 않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음악을 지었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제목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 감성이라도 갖다 붙일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제목은 죄다 알 수 없는 외국어에 숫자뿐이니.


그나마 약간의 재미를 붙인 것은 피아노 소곡집이나 명곡집이다. 여기에 있는 곡들은 한글 제목이 있었다. 그리고 제목에 맞게 곡을 느낄 수 있었다. ‘뻐꾹 왈츠’ 안에는 뻐꾸기 소리가 있었고, ‘꿈꾸다 깨어난 인형’은 인형이 잠들다가 깨어나서 춤추는 서사가 음악에 있었다. ‘워털루 전쟁’에는 대포 소리와 행진 소리가 있었다. ‘강아지 왈츠’ 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피우는 듯한 모습이 떠올랐고 모든 자장가들은 정말 잠이 잘 올 것 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피아노학원에서 가서 피아노를 치는 한 시간 동안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이런 제목이 붙은 재미있는 곡을 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십 분이었다.


그러다 감수성이 폭발할 십 대가 되면서 접한 뉴에이지 피아노 곡들은 완벽한 타이밍에 나를 흔들었다. 멜로디로 말을 거는 듯 한, 듣기만 해도 눈물과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이상한 마술이 걸린 음악들이었다. 멋진 가수들이 랩을 하고 춤을 추던 그 시절 나는 그 어떤 가수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가사 없이 음악으로만 얘기하는 이 피아노곡들에 빠졌다. 어떤 ‘영감’님이 오셔야 이런 곡을 만들 수 있을까.


더욱 좋았던 것은 이 분들의 곡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피아노학원 7년 짬밥으로는 이분들의 웬만한 것은 악보를 보면 그럴싸하게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내가 구현할 수 있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음악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들어와서 내 것이 되는 착각이 들게끔 한다.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는 느낌처럼 본능에 충실한 쾌감이 또 있을까.


내가 이렇게 피아노를 즐기려고 그 인고의 세월을 알지도 못하는 악보를 기계처럼 치며 단련해 왔구나. 왜 다니게 되었고 기억도 안 나지만 들은 얘기로는 그냥 엄마 손에 끌려가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뭘 시키시는 분들이 아닌데, 왜 피아노학원에 데려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 의사가 하나도 반영되지 않고 시작한 그 경험은 음악을 듣는 자세와 취향을 잡아 주었고, 악기에 대한 호기심, 절대음감, 단단한 손가락과 튼튼한 허리를 만들어 주었다.


음악 중에는 가요도 좋아하지만 편식이 심한 편이다. 정말 좋아하는 곡은 여러 번 듣는다. 몇 달 동안 한 곡만 들을 때도 있다. 다만 운전하면서 몇 달 동안 한 곡만 틀어두는 경우는 누가 옆 자리에 탈 때마다 리스트를 바꾸거나 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3~4분만 넘어가면 들통나는 이 이상한 취향은 남에게 이해받기를 일찍 포기하는 편이 낫다.


몇 달 동안 들으면서 혼자만의 음악을 즐기는 습관이 생겼다. 반주가 풍부한 곡들은 악기들을 분리해 본다. 베이스나 기타의 선율만 따라갈 때도 있고 고음에서 가끔 들어오는 건반을 주의 깊게 들을 때도 있다. 반복되는 주제 음악만 생각하며 듣기도 한다. 편식이 심한 만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강한 편이다. 몸체를 차근차근 분해해서 나오는 모든 조각들을 훑어본다. 그래야 충분히, 오랫동안, 빠짐없이 좋아할 수 있다.




참, 생각나지 않았던 그 음악의 주인공은 스티브 바라캇이었다. 결국 네이버 음악 찾기가 찾아주었다. 옛날 라디오를 하나씩 듣던 중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이 머리에 떠오른 걸 수도 있겠다. 조금 과장해서 웬만한 시그널이나 배경음악은 그 아저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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