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의 문제

by 우주속의 먼지

스물두 살 즘 되었을 때,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덜컥 취직이 되었다.

그 흔한 휴학도 한번 안한채 회사를 꽤나 일찍 들어가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나는 시간 낭비 없이 바로 대학교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고 싶었고, 공부를 더 하거나 가방끈을 늘리는 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당시 나의 직책은 '매니저'. 어느 곳으로 파견되어 어느 공간 관리자였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인력 관리도 함께 맡았다. 그 인력들이란 모두 '아르바이트(임시직)'였다. 예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거기서 진행되는 일을 신입직원인 나보다 거기 몇 년씩 아르바이트를 한 임시직들이 더 잘 아는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일은 전임자에게 그때그때 물어보거나 기존 직원들에게 물어가며 배울 수 있지만, 나이가 어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임시직 직원들 중에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보아하니 그 사람이 일종의 대장이었다. 대장이 대장노릇 잘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랗게 어린애가 새 대장으로 온 것이다. 헌 대장이 나를 무척이나 못마땅해하는 건 어린 나라도 바로 눈치챘다.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 사람을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00 씨'라고 불러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그 '씨'가 폭탄의 씨가 되어버렸다. 헌 대장은 내가 자신을 하대했다고 온 동네방네(주변 직원들 + 본사 직원들) 얘기하고 다니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쓰리쿠션을 맞듯이 본사의 어느 직원에게 전화를 받았다.



"사회생활 할 때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언니'라고 부르든가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씨'라고 하면 안 돼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마음속의 대답은 '아니 이름불리기 싫으면 직책이 있던가... 어쩌라는 거야.'였다.



그 당시 나는 '씨'가 하대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그때도 이름뒤에 '님'을 붙이는 문화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언니라고 부르라니? 만난 지 며칠 안되어 친분도 없고, 더구나 나랑 전혀 친해질 기미가 없는 상대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색하지 않은가. 그리고 선배님이라니.... 학교선배? 직장선배? 직장 선배일 수는 있었지만 그러면 나는 거기 일하는 모든 이를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 뒤로 그 헌 대장이 나에게 한 행동은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일일이 묘사하기도 민망한 여러 일들, 한마디로 말하면 '대놓고 따돌림'이었다. 나는 일진 무리가 있는 중학교에 다시 입학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그 시절을 잘 견디고, '새파란 어린 매니저' 에게 관리받기 싫은 올드보이들이 모두 떠나갔다. 나는 직접 인력모집을 해서 사람들을 다시 꾸렸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위 사건을 떠올리게 한 호칭 문제를 최근에 다시 겪었다. 점점 사회생활을 겪으며 노련해진 나는 직책이 없고 나이가 많은 분들을 통칭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호칭이다 진짜 선생님들만 빼고. 그리고 친해지면 줄여서 '샘'이라고 부른다. 이름 뒤에 붙이면 정감 있고 예의도 있는 드문 호칭이다. 그러다 보니 직책이 따로 있어도 '샘'이라고 가끔 부르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피디라는 역할을 버젓이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평소 다른 사람에게 하던 습관처럼 '샘'이라고 불렀다가 이상한 피드백을 받았다. 자기를 왜 그렇게 부르냐며 따지기 시작한 것.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고, 뭐라 말할 줄도 몰랐다. 그다음에 들은 말은 더욱 이상했다. 본인이 싫어하는 누군가가 나와 이름이 똑같은데, 그 사람이 본인을 '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샘'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분이 나쁜다는 얘기였다. (도대체 어디서 논리의 고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그럼 호칭을 정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생각해 보고 알려주겠다'라고 한다. 결국 끝까지 알려주진 않았고, 나는 그를 피디님이라고 고쳐 부르긴 하지만 더 이상 부를 일을 만들고 있지는 않다. 그러고 보면 생각해 보겠다는 답도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서양 문화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호칭에서만큼은 부럽다. 개인과 개인 간의 호칭을 비롯해서 가족관계에서 나오는 복잡한 호칭까지도. 우리나라에서의 시집과 친정의 차별적인 호칭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직책과 관계를 다 떠나서 그냥 편하게 이름을 부르거나, 관계를 넣더라도 '법적인 아버지, 법적인 언니'라고 객관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영어가 훨씬 COOL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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