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빈부격차

by 베가

프리미엄






그들이 내 시간과 잠을 가져갔어. 내가 사랑한 그들이. 하지만, 그래도 좋아. 조금 덜 울고 더 웃게 되었으니까. 열심히 일해서 또 만나러 갈 거야.


지민은 끄적이던 다이어리를 한숨과 함께 덮었다. 축 처진 고개를 들어 스터디 카페에 입실한 사람의 수를 눈대중으로 세어보았다. 총 일흔 여섯 자리 중에 넷. 청소 알바를 시작한 석달 전에 비해 월정기 회원이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폐업이 머지 않았다. 지민은 상가 입구에서 주워온 전단지를 가방에서 꺼내 한참을 들여다봤다. 옆 건물에 새로 오픈한 초대형 스터디 카페는 가격이 저렴했고, 수면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망하면 안 되는데. 종이를 와그작 구긴 지민은 애먼 입술을 짓씹었다. 미성년자를 고용해주는 업장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장은 만삭의 서글서글한 임산부였다. 시급 만 오천원의 쏠쏠한 주말 알바 구인글엔 이미 열 명 남짓한 지원자가 몰린 상태였다. 큰 기대를 갖지 않았지만 지민은 선택받았다. 프로필로 설정해둔 아이돌 그룹의 사진 덕분이었다.


일은 간단했다. 서 너개의 청소도구를 번갈아 들고 한 시간을 움직이면 일당이 입금되었다. 사장은 최애가 같은 띠동갑 소녀에게 스스럼 없는 관용을 베풀었다. 휴게실 냉장고 안에 간식을 챙겨놓기도 했고, 중복으로 뽑힌 굿즈며 포토카드를 주기도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삼이 왜 돈을 벌러 나왔으며, 옷은 왜 항상 똑같냐고. 어딜 가든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질문 대신, 필기구의 사각거림과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전부인 세상.


벌이처이자 피난처. 지민은 실로 오래간만에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꼈다. 사장이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랬다.


잠을 통 못 잔다고 했다. 아이가 너무 자주 깬다고. 모자란 비품을 주문해달라고 남긴 메시지는 며칠이 지나도록 읽히지 않았다. 한참만에 연락이 닿은 사장은 산후 우울증이 왔다고 했다. 자기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대신 잘 버텨달라고도 했다. 주간 알바가 그만뒀는지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지민은 그간의 정을 떠올리며 군말없이 그것을 떠안았다. 그러나 화장실이 갈수록 더럽고 커피 원두와 복사용지 같은 기본 물품이 자꾸 비어있다는 플랫폼의 후기 하나가 결정타를 먹였다.


이후로는 단골도 사장의 정신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김없이 처리해주던 정산도 밀리기 시작했다. 속절 없이 시간만 죽이던 지민은 어느 순간 기대를 놓기로 했다. 대안을 찾아야 해.


***


마지막 남은 종량제 봉투를 벌려 잔뜩 압축시킨 화장실 휴지를 담던 와중에, 휴대폰 알림이 떴다. 최애의 새 앨범이 발매됐다는 소식이었다. 곧장 들어가본 팬 커뮤니티는 한껏 달떠오른 상태였다. 팬 싸인회에 무료로 초대를 해준다는 스트리밍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월정기 서비스를 사용할 형편이 못되었다. 운이 좋으면 추첨으로 공연을 볼 수 있는 공개방송 스케줄은 몇 개 없고, 대신 회당 십오만 원을 상회하는 대관 일정이 빽빽이 잡혀 있었다.


이번 활동도 앨범 한 장 못사고 방구석에서 십 분 마다 광고 팝업을 꺼 가며 직캠 영상이나 보게 되겠지. 데이터가 끊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엄마의 계좌에서 자동이체 되는 통신요금은 아무리 절약을 해도 석 달에 한번 꼴로 연체가 되었다.


엄마가 버는 돈은 대부분 방문요양보호사의 월급과 이혼한 아빠가 떠넘기고 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는 장기요양등급을 받았지만, 시설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한사코 거부했다. 삼대가 함께 사는 반지하 투룸 빌라가 외할머니의 명의였고 엄마에게 소득이 있었기에 의료 급여도 기대할 수 없었다.


엄마는 한정식 솥밥집에서 한달에 나흘만 쉬며 열두 시간씩 일했다. 월급을 삼백만원 이상 받을 수 있는 근처의 직장으로서는 그곳이 유일했다.


집안력도 없는데 너무 가혹해. 유통기한이 임박한 세일 코너에서 집어와 말라 비틀어진 편육을 씹으며 엄마가 투덜거렸다. 쉬는 날이면 엄마는 으레 막걸리를 한 병 들이켰는데, 술을 이기지 못해 고구마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고선 지민에게 당부하는 것이 있었다.


나중에 나도 저렇게 되면 넌 꼭 도망쳐. 알았지? 접이식 매트리스에 비스듬히 누워 인대가 늘어난 손목을 휘휘 돌리던 엄마는, 웃는건지 우는건지 헷갈리는 입모양으로 그 말을 반복했다. 염색할 시기를 놓쳐 희끗하게 올라온 새치 때문에 본래 나이보다 족히 열 살은 더 들어보였다.


청소가 끝났는데 지민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스터디 카페에서 사람들이 종일 뒤를 닦은 냄새 나는 휴지를 치우고 귀가하면, 외할머니가 여기저기 벗어둔 성인용 기저귀를 정리하고 잔변이 흩뿌려진 바닥을 말끔히 닦는 건 지민의 몫이었다.


삶이 부서진 곳에는 불면과 악취가 스며든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사라졌던 때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엄마는 괴로움에 밤새 뒤척이다 출근하기가 부지기수였고 집안에는 제때 치우지 않은 생활 쓰레기가 쌓여갔다. 집이 경매로 넘어간 후 외할머니 댁으로 합가를 하고 한동안은 괜찮았다. 외할머니의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향초도 켜고 포인트 벽지도 새로 붙이며 여자들끼리 뭉쳐서 잘 살아보자는 다짐을 주고 받았다.


같은 생활 공간에서 겪는 치매란 실로 잔인한 병이었다. 날이 다르게 악화되는 노인의 병세는 시한폭탄처럼 지민과 엄마의 심장을 시시각각 조여왔다. 모두가 잠든 줄 알았던 한밤중에 대문을 열고 나가 대로변에서 맨발에 팬티 바람으로 발견되었던 앙상한 노인의 모습이, 모녀의 꿈속에서 무시로 공회전하며 얕은 잠을 할퀴었다.


***


언제 허물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심신에 힘을 잔뜩 주고 여섯 날을 살아낸 엄마가 술에 손을 뻗듯, 지민은 최애를 품고서 음울한 미성년의 날들을 흘려 보냈다. 집에는 와이파이가 없으니까, 딱 이것까지만 보고 가야지. 휴게실 의자에 앉은 지민은 몇 시간 전 등록된 최애의 신곡 뮤직비디오를 멍하니 감상했다.


영상은 순식간에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 급상승 동영상의 알고리즘을 탔다. 중견 기획사에서 시작해 데뷔 삼년차를 채운 그들은 어느덧 기부도 하고 집도 샀다는 소식을 속속 전해왔다. 말도 탈도 많았지만 글로벌 차트 기록이나 앨범 판매량이 완만한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공연이 기획되면 해외팬들이 떼지어 보러 와서 전석이 매진 되기도 했다.


보고싶어. 가까이서. 단 한 번 만이라도.


수개월 전, 티케팅에 실패하고 취소표로 천신만고 끝에 구한 공연장 삼층의 제일 뒷좌석에서 지민은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전광판 위로 콩알만하게 보이던 최애의 미소는 세상의 모든 빛을 모아놓은 듯 눈부셨다. 두 시간 반 동안의 꽉 찬 행복은 그만큼의 대가를 남겼고, 명세서를 확인한 엄마는 비상시에 쓰라며 맡겨두었던 신용카드를 두 번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사랑과 희망을 고양시키는 신곡의 가사를 읊조리며 지민은 스터디 카페를 나섰다. 늦여름 밤의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집으로 향하려는데 휴대폰 액정에 중고거래 플랫폼의 구인 알림이 떴다.


급구. 시급 오만원. 지금 바로 와주실 분.


시급 오만원이라니. 사기이던지 장난일거라 여기면서도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게시물을 열어 본 순간, 지민의 동공이 빠르게 확대됐다. 첨부된 사진엔 어림잡아 봐도 수백 장이 넘어 보이는 최애의 새 앨범이 쌓여 있었고, 그 아래로 몇 줄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팬싸 앨범깡한 거 수작업으로 뜯어서 포카만 따로 분리한 뒤 시디 폐기 작업 도와주실 분 급구합니다. 내일 아침에 부모님 오시기 전까지 끝내야하니 손 빠른 분만 지원해주세요.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지민은 지원서를 작성했다. 고삼이지만 알바를 많이 해봐서 일처리는 빠릅니다. 지금 즉시 갈 수 있어요. 저도 이 팀을 좋아해요. 꼭 하고 싶습니다.


너무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면 읽지도 않고 넘겨버릴까봐, 최대한 침착하게 자기 소개란을 채운 뒤 제출 버튼을 눌렀다. 쭉쭉 늘어나는 지원자의 수를 새로고침하던 지민은, 소진되어 가는 데이터를 아끼기 위해 근처 편의점 입구로 붙어섰다. 얼마 전까지 야간 근무를 서던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에게 공유받은 패스워드가 다행히도 통하고 있었다.


오 분쯤 지났을까. 지민은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냉큼 받았다. 알바 지원하신 분 맞죠.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앙칼지고도 야무진 데가 있었다. 맞아요. 진짜 고삼이에요? 네. 그렇구나. 나도 고삼인데.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근데 지금 어디예요? 지하철역 편의점 근처요. 가깝네요. 십 분이면 도착하겠네. 주소 남길테니까 공용현관에서 채팅 보내시면 내려갈게요.



***


오가는 길에 눈에 담은 적이 있는 대단지 신축 아파트를 향해 지민은 달음질을 쳤다. 엄마, 나 오늘 스터디 카페에서 밤새 공부하고 바로 학교로 갈게. 내일 쪽지 시험이 있어. 간혹 귀가가 늦어도 공부 때문이라는 거짓말을 믿어주는 척했으니, 이번에도 괜찮겠지하며 지민은 메시지를 남겼다.


사방이 폐쇄된 웅장한 출입구 앞에서 숨을 고르던 지민은, 낯선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러자 대낮처럼 불이 밝혀진 관리실과 그 오른편으로 굳게 닫힌 외부인 출입용 안전바가 보였다.


팔짱을 낀채로 졸다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깬 초로의 경비원이 비척비척 다가오더니 방문 목적을 물어왔고, 지민은 중고 거래차 왔다고 짧게 답했다. 캐비넷을 뒤져 출입자 명부를 꺼내 온 그는 이름과 연락처, 방문하는 동호수를 받아적은 뒤 해당 세대와의 짧은 확인 통화를 마치고서야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도착했어요. 약속대로 채팅을 보내자 마자 상대방은 내려갈게요,라고 답변을 해왔다. 운동화의 앞코를 세워 맨들맨들한 바닥을 툭툭 찍으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커다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비슷한 키와 체형과 머리카락 길이. 둘은 서로를 잠시 관찰했다.


따라오세요. 소녀는 무언가 판단이 선 듯 거침없이 앞장섰다. 그런데 진공상태 마냥 조용하던 엘리베이터 내부의 청정기 센서가 갑자기 시뻘개지더니 사나운 기세로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혹시 자신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가 싶어 팔을 들어 소매에 코끝을 댔다. 원래 오작동 잘 해요. 소녀는 빙긋 웃으며 삼십 삼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한 쪽 벽면에는 광고와 뉴스가 송출되는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맞은편에는 동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약력이 게시되어 있었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오십대 여성과 법무법인 대표 출신의 육십대 남성이 각각 내건 공약을 읽으며 지민은 연신 눈을 꿈뻑였다. 이 아줌마는 남편이 바람나서 이혼했고, 아저씨는 자꾸 재판에 져서 높은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이런것도 감투라고 가만히는 못 사는지. 소녀의 시니컬한 품평에 지민은 뭐라 대꾸할 꺼리를 찾지 못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윽고 도착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복도를 가득 메운 수십 개의 택배상자였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지민의 곁으로 바짝 다가선 소녀가 양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반말모드 어때. 상관 없어. 뭐부터 하면 되니. 내가 박스를 열테니까 너는 앨범 비닐을 뜯어서 플라스틱이랑 종이를 각각 따로 상자에 모아줘. 다 채우면 지하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오면 돼. 부모님은 새벽 비행기로 인천에서 들어오니까 다섯시 전에만 끝내자. 최대한 빨리 해볼게.


한 층에 한 세대만 거주하는 대형 평수였기에 두 소녀는 소음에 개의치 않고 상자와 내용물을 북북 찢어발겼다. 다해서 얼마를 쓴걸까. 가수가 컴백할 때마다 이래왔던 것일까. 아까운데 나눔이나 기부를 하면 안 되나. 부모님 몰래 이러고도 후환이 없는건가.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지민은 마른침만 연거푸 삼켰다.


저기, 혹시. 한참 눈치를 보던 지민이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뭐, 화장실? 어림짐작한 소녀는 디지털 도어락의 터치패드에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소형 평수의 방 하나만큼 널찍한 현관에는 커다란 화병과 모던한 유화 두 점이 우아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버리는거니 한 장만 가져도 될까 해서. 소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당연히 되지. 아예 한 박스 쟁여가. 아니, 그 정돈 아니고. 앨범 한 장을 주워 책가방 속으로 얼른 욱여넣은 지민은 덮어쓰고 있던 후드끈을 잔뜩 조여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렸다.


두 사람의 손발이 잘 맞아, 물량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외제차가 즐비한 주차장 끝의 분리수거장에는 새하얀 캐디백과 주름 하나 없는 가죽 드라이빙 슈즈, 미미하게 변색된 그릇 세트, 두터운 전집류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대로 주워다가 중고로 내다 파는 상상이 겉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서 지민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도로 십이층 쯤 올라왔을 때 소녀가 벽보를 손가락으로 쿡 짚더니 불현듯 말했다. 사실 울 아빠야. 이 아줌마 이혼 소송에서 아빠가 큰소리 쳐놓고 졌어. 그래서 둘이 원수가 됐거든. 기싸움이야, 이거. 주민에게 봉사하는 그런게 아니라고. 묻지도 않은 개인사를 줄줄이 읊는 소녀를, 지민은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난 성유진이야. 넌? 나는 한지민.


새벽 네 시쯤 마지막 상자를 털어낸 유진은 지민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복도식으로 된 구조를 따라 몇 발짝 걷자 유진의 방이 나왔다. 덕질로 모은 갖은 물품을 홀린듯 훑던 지민의 시선이, 유진과 최애가 팔짱을 낀 액자에서 멈춰섰다. 그 아래 원목선반에는 최고급 사양의 디지털 카메라와 속칭 대포라 불리는 망원렌즈, 4k 캠코더와 외장하드가 여러점 놓여 있었다.


혹시 너 최강튜브 운영자니. 지민은 최애의 홈마 중에서 가장 팔로워수가 많은 계정의 이름을 댔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이 사진들, 그 채널 직캠에서 본 적이 있어.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서랍을 열더니 희귀한 컨셉의 포토카드를 한 뭉치 꺼냈다. 온 김에 이것도 가져가. 재고가 많아. 과한 호의를 쭈뼛쭈뼛 받아든 지민은 어떤 생각에 빠져들었다. 최강튜브의 운영자는 팬덤 내에서 해외 공연 스케줄까지 빠짐없이 따라다니는 걸로 특히 유명했다. 고소득의 유능한 사회인일거라 여겨왔건만, 동갑이었다니.


지민은 지금 드는 불편한 감정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부러움을 넘어선 경이로움에 좀 더 머물고 싶기도 했고, 이쯤하고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돈 더 필요하니? 일당으로 오만 원짜리 다섯 장을 건네며 유진이 말했다. 필요하긴 해. 그럼 이번 주말부터 같이 일하자. 시급은 똑같이 쳐줄게. 무슨 일인데 시급이 그렇게 쎄. 촬영 보조. 유진은 부피가 가장 크고 무거워보이는 카메라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팬싸인회 있거든. 본래 하던 애랑 싸웠는데 너가 와서 다행이야. 지민이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유진은 기계의 사용법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해뜰녘의 거리엔 여느 때처럼 쓰레기를 수거하는 덤프 트럭과 새벽 배송을 도는 냉장 탑차, 배달 오토바이가 간헐적으로 지나다녔다. 잠을 팔아 고되게 생업을 이어가는 이들보다 빠르고 쉽게 큰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지민의 마음 한 켠을 소란스럽게 했다.


금방 본 모든게 다 반칙이잖아. 그렇지만. 집에 도착한 지민은 열대야로 찐득거리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찬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전원이 나간 전기밥솥에서 꺼낸 식은밥 한 덩어리를 우물거리며 고심한 끝에, 유진의 번호를 저장했다.



***


입장하실게요. 돌발 행동은 즉시 퇴장 조치합니다. 각 멤버 앞에서 일 분 이상 지체하시면 안 되요.


싸인회를 찾은 팬들의 국적과 연령대는 각양각색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해외팬 몇몇은 올 때마다 교통비에 숙박비는 기본이고 입장 프리미엄으로 천만 원까지도 태워봤다며, 어눌한 한국말로 호소를 했다. 사랑, 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가방에 주렁주렁 매단 아티스트의 키링을 만지작대는 손길들은 너나 할 것 없는 기대와 흥분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민은 샵에서 풀메이크업을 받고 온 유진의 옆에 어정쩡하게 앉아 주변을 살폈다. 제일 앞자리라니.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건가. 새 앨범의 트랙이 행사장의 배경음으로 깔리고 머지않아 그들이 나타났다. 일순 터져나온 플래시 세례에 지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처음 왔구나. 기다리던 차례가 왔건만 그저 뻣뻣하게 굳은 지민에게 최애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앨범 속지를 펼쳐 능숙하게 싸인을 하던 그가 눈맞춤을 해왔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풍겨나오는 짙은 향기에 지민은 고개를 스윽 돌렸다. 귀엽네. 휴대폰 줘 봐. 마치 알던 사이인 듯 자연스레 감기며 최애는 몇 장의 셀카를 남겨주었다. 또 놀러 와.


순식간에 끝난 대면 이후, 멤버들은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의상을 번갈아 입으며 포즈를 취했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 그들이 퇴장하고, 행사장을 나온 팬들은 근처의 카페에서 실시간 업로드 작업을 했다.


처음인데 잘 찍었네. 담백한 칭찬을 건네고 영상 편집에 몰두하는 유진의 곁에서, 지민은 원본 데이터의 구매를 원하는 팬들과 오픈채팅을 나누며 입금자 명단을 취합했다. 유진은 반응이 가장 좋았던 사진을 선별해 별도의 폴더로 모았다. 이제 이걸로 슬로건이나 포토카드나 스티커를 제작해서 거래 플랫폼이랑 생일 카페에 파는거야. 그럼 너는 돈 벌려고 팬을 하는거야? 지민의 말에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이거 백날 해봐야 본전치긴데. 기계도 계속 좋은 걸로 바꿔야되고 팬싸인회 컷이 점점 높아져서. 그냥 도파민이지, 뭐.


양팔 가득 이고 진 카메라 가방을 콜택시 짐칸에 실은 두 사람은 SNS를 들여다봤다. 선망과 환희로 술렁이는 댓글란을 스크롤하던 유진이 시린 눈을 부비다가, 지민에게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넌, 대학 안 가? 난 못 가. 돈 벌어야 해. 뭔 소녀가장이냐. 집에 빚이 많고 환자도 있어. 예상을 넘어선 답에 유진은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너는? 난 오빠가 로스쿨 다녀서 어디 붙어도 망했어. 아빠는 인서울만 하라는데, 어중간하게 입시해봤자 뭔 소용이겠어. 좋아하는 거 계속 할 거야.



***


닿을 수 없던 존재와의 거리가 좁혀진 뒤 지민의 통장에는 차곡차곡 돈이 쌓여갔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유진의 마음에 자기 못지 않은 구멍이 있음을 알게 되고부터는 묘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어디 그 뿐인가. 유진이 웃돈을 치른 공연 티켓으로 1열에 앉는 날들이 잦아지다보니, 최애가 먼저 지민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런 게 행복일까. 그런데, 얼마나 갈까. 유진의 호의에 운 좋게 편승했을 뿐인걸. 삶의 밑바닥에 오래 머물러온 지민은 스스로의 직감을 속일 수 없었다. 현실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아티스트와 컨텐츠를 보고 또 봐도, 더는 억눌러지지 않는 불길한 기시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빨리 병원으로 와.


규모와 역량 면에서 공히 신기록을 세운 단독 콘서트의 촬영을 마치고 나오던 지민은 곧장 사색이 되었다. 엄마로부터 걸려온 부재중전화 수십 통과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카메라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하철을 향해 뛰었다. 나 지금 가봐야 돼. 나중에 연락할게. 무슨 일인데. 유진이 걱정스레 외쳤다. 외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고관절이 부러졌대.


귓전에 꽂히던 라이브 음향과 휘황한 조명의 세계에서 잿빛 숙명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령인데다 신장 기능이 엉망이라 수술 후 찾아온 섬망을 이겨내지 못한 외할머니는 혼수상태였다.


네가 당분간 간병을 해야해. 학교에는 말해둘게. 수능이 불과 한 달 뒤였지만 어차피 형식적인 응시였기에 별다른 박탈감은 들지 않았다. 병원비를 융통하기 위해 먼 친척에게까지 전화를 돌리던 엄마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지민은 보호자 침상에서 데쳐진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 선잠을 자는 엄마에게 빌린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엄마의 계좌에, 유진과 일하며 번 돈을 전부 송금하고서 입원실 바깥의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하룻밤새 몰라보게 푸석해진 볼을 타고, 차가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엄마 곁에 앉아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는데, 벽에 걸어둔 외투에서 무언가 작고 반짝이는 것이 나풀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연의 클라이막스에서 뿜어져 나왔던 컨페티 조각이었다. 지민은 그것을 집어 코 끝에 댔다. 살면서 처음 맡아보는 달큰한 향기가 났다. 후각이 냄새에 거의 적응할 즈음, 지민은 작게 입을 벌려 그것을 삼켰다.


***

할머닌 좀 어떠시니. 한동안 잠잠하던 유진이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어. 너는 괜찮아? 뭐 그럭저럭 적응했어. 그럼 잠시 보자.


동업 관계는 일단락 되었지만 유진은 아직 지민을 원했다. 촬영 후 돌려주지 못한 메모리 카드를 들고 지민은 유진의 집앞을 찾았다. 만나기로 한 곳에서 한참을 서성댔지만 유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볼 요량으로 단지 내 산책로를 걷던 지민은, 구석진 놀이터의 시소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중년 여자와 고개 숙인 유진을 발견하고는 몸을 조경수 사이로 숨겼다.


이 세상이 네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유진의 어머니는 자태가 아름다웠다. 꾸밈새에 섬세하게 공을 들이고선, 날 선 분노를 내지르는 모습이 무척이나 기괴했다. 딸의 머리통을 밀쳐내듯 쿡쿡 찌를 때마다, 어깨를 덮은 생머리와 몸의 라인이 훤히 드러나는 원피스 자락도 같이 흔들렸다.


인생의 오점, 들인 돈, 이기적, 나가 죽어 같은 말들을 서슴없이 뱉어낸 그녀가 발을 쿵쿵 구르며 자리를 떴다. 핏기 없이 쪼그려 앉아 있는 지민에게, 유진이 어느덧 소리없이 다가왔다.


얘 좀 봐라. 왜 네가 울고 있니.


아빠가 떠나던 때도, 외할머니가 위독하던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폭언에 무덤덤한 유진을 보는 순간 터져나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반팔 차림으로 뛰쳐나온 유진의 양 어깨위로 지민은 목도리를 풀러 감싸주었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어. 아빠 일이 잘 되면서 매사 욕심을 내더니, 성적으로 사람을 잡는거야. 그냥 날 포기하면 되는데. 과외 시켜봤자 소용없다고 보란듯이 연예인만 쫓아 다녔는데도 그게 안되니. 난 이 집구석에서 그저 돈 까먹는 귀신인거지. 유진이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슬며시 권했지만 지민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그럼 넌 이제 탈덕했구나. 처음엔 꿈꾸는 것처럼 좋았어. 근데 공연 보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내가 점점 이상해지더라. 이럴 때가 아닌데.


유진은 끌어들여서 미안하다고 했다. 너 없으니까 허전해서 어떤 뇌 과학자가 만든 영상을 좀 봤거든. 우리 같은 애들은 보통의 일상으론 행복 호르몬이 잘 안나와서, 특별한 자극을 찾게 된다는거야. 근데 뭐 어쩌라고. 전두엽이 망가진게 느껴져도 멈출 수가 없는데.


자조적인 유진의 손가락 사이로 지민은 깍지를 꼈다. 넌 이미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야. 속이 파먹힌 나무가 쓰러지듯 온몸을 기대온 유진을 토닥이며, 지민은 실금 같은 그믐달이 뜬 하늘을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봤다.



***


치는 둥 마는 둥 했던 수능 이후로 지민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생겼다. 전신마취의 부작용으로 인지 기능이 크게 떨어진 외할머니가 결국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이었다.


평소 학을 떼던 곳에 휠체어를 타고 고분고분 입소한 노인은, 매일 새롭게 태어난 듯 자신의 이름을 주변에 묻고 또 물었다.


그들을 세상으로 불러낸 근원이 떠나가자, 반지하 방에는 비로소 숨통이 열렸다. 의학 기술과 복지 제도가 기억을 잃은 노인의 수명을 가늘게 연장시켜 놓는 동안, 모녀는 몇 년 만에 뷔페도 가고 세일하는 속옷도 사들이면서 두 번째 족쇄였던 고금리의 빚을 갚아나갔다.


입이 하나 줄었다고 그저 안도하는건 사람으로서 지닐 태도가 아닌 것 같아, 지민은 면회를 다녀올 때마다 속이 아렸다. 반면,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난 엄마는 바뀌는 운을 붙잡겠다는 듯 일 년의 말미를 두고 노인의 짐을 싹 처분했다.


치매는 못 고치니까 이렇게 되는 게 맞아. 할머니가 우리 살라고 도와주셨다, 여기고 그만큼 자주 찾아뵈면 돼.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나락으로 밀어버릴듯 날름거리던 대출 원금의 자릿수가 줄자, 엄마의 말투는 점점 보드라워졌다. 있잖아, 지금이라도 재수 시켜줄 수 있어. 새해 맞이로 찾은 보신각을 깨끔발로 넘어다보던 엄마가 인파 속에서 뜻밖의 소리를 했다. 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지민은 마지막 원죄를 풀어보려는 엄마의 심사를 기민하게 읽었다. 무슨 일? 앞으로는 인생을 사는 대가가 너무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 범종을 때리는 당목의 반동을 바라보며 모녀는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


손발이 묶여있던 미성년이 끝나고, 지민은 안정된 몫을 스스로에게 찾아주기로 마음 먹었다. 눈여겨보던 국가기술자격증을 따기 위해, 일하던 스터디 카페에 회원 등록을 했다. 어느덧 돌이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사장은 돈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지민은 정가대로 지불했다. 합격할 때까지 용돈을 대겠다는 엄마의 제안도 고사했다.


이제 돈이야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가끔씩 재수학원을 탈출한 유진이 보내온 직캠의 원본을 받아 편집 작업을 하기도 했고, 보다 급전이 필요해지면 물류센터에 나가거나 특수 단기알바를 하거나 구청을 찾아가 기간제 근로를 했다.

지역 축제에서 관계자 전용 출장 뷔페의 배식 담당을 맡은 늦봄의 어느 날. 초대가수로 온 최애가 저 멀리서부터 줄을 서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자투리 시간마다 펼쳐보던 필기시험용 족보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은 지민은, 펑퍼짐한 스탠 국자를 빼들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저는 제육을 좀 많이 주세요. 최애의 식판 위엔 탄수화물 하나 없이 샐러드와 단백질만이 소량씩 담겨 있었다. 무대 조명이 없는 곳에서 마주한 그는, 화장이 약간 들뜬데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자잘하게 터져있어 여느 피곤에 찌든 사람으로 보였다.

몇 번의 라이브 방송에서 다이어트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언급하던 것이 떠오른 지민은, 먼저 고기부터 내어준 뒤 발치에 놓여있던 대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아지랑이 같은 김이 피어오르는 쌀밥을 수북이 담아 건넸다. 엉겁결에 받아든 그는 놀란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굶주린 뒷사람들의 채근에 디저트 코너로 어영부영 떠밀려갔다.



***


행사가 끝난 뒤 정산받은 일당을 들고 지민은 동네 마트에 들렀다. 촉촉한 편육과 막걸리 두 병을 사서 귀가하는 길은 설레지도, 그렇다고 따분하지도 않았다.


네 인생의 첫 술이구나. 어둑한 방안에서 엄마가 건넨 사발을 받아든 지민은 비강을 톡 쏘는 텁텁한 액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비워냈다.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나중에 엄마가 외할머니처럼 된다 해도, 버리거나 도망치지 않으려고. 듣고 있어?


취기가 도는 딸의 잔을 다시 채우며, 엄마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다음 주에 안전진단 하러 업체에서 나온대. 여기도 지어진지 사십 년 넘었잖아. 운 좋으면 재개발이 될지도 모르지. 동네가 후져서 그렇지, 입지는 괜찮으니까. 큰 시공사가 붙었으면 좋겠는데. 그치?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금세 몇 계단을 뛰어오르려고 하는 엄마의 등에다가 손톱을 세워 위아래로 긁어주던 지민은, 문득 육중하게 쏟아지는 졸음을 느꼈다. 지민은 보았다. 엄마의 입술에 묻은 기름기가, 창밖을 지나던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받아 유난히 번들거리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다. 바싹 말라붙어 있던 때보다는 아무렴, 지금이 낫다는 것을.


우리에게 안락한 거처를 내어주고 생판 타인들 사이에 눕혀져 까무룩 저물고 있을 외할머니의 밤은 어떠한가,까지 생각이 가 닿기 직전에 지민은 잔을 탁 내려놓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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