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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Jun 22. 2022

가난의 문법

가난하게 살아갈 이유



5시 30분

파스를 붙이고, 영자 씨는 다시 이불 위에 누웠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일곱 시에는 동네에 있는 공영 주차장 청소 일정이 있었다. 청소를 마치고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곧바로 나가서 재활용품을 줍고, 열한 시 사십 분까지 경로당에 가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경로당에서 사람들과 오랜만에 인사하고, 세 시쯤에 나와 다시 일을 할 계획이었다. 201p



적지 않은 노인이 거리와 골목에서 재활용품을 줍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도 계절도 고려하지 않니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 어느 날씨에도 거리엔 그들이 있습니다.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복잡한 생각이 얽힙니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그들을 연민해야 할까요. 거리 청결에 기여하는 노고를 감사해야 할까요. 그들은 왜 폐지를 줍고 있을까요. 충실하지 못한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까요. 어리석고 무지해서 그럴까요. 열심히 살지 않아서? 자식과 문제가 있어서? 불편하고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낼 문장은 명쾌합니다. '가난한 노인들은 가난한 이유가 있어' 지요. 그들이 겪는 불행에 당위를 부여했으니 마음 편히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까요.

단순한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한 삶에 어떤 이유가 꼬리표로 붙어 있든, 세상에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난의 문법>은 이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가난의 문법>은 익명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인터뷰를 조합해 만든 가상 인물, '윤영자'가 살아가는 하루를 습니다. 윤영자는 1945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8에 부모님을 따라 상경했고 25세가 되던 해 결혼해 2019년에 75세를 맞이한 여성입니다. 6남매를 출산해 키우는 동안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이 없으며, IMF 등 현대사를 뒤흔든 여러 사건 겪는 동안 평범하지 않았던 적도 없는 여성입니다. 현재는 노인빈곤층이 되어 재활용품을 주우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죠.


<가난의 문법>빈곤층 구제 개인 노력과 자립에 맡겨두는 사회 태도 반복해 합니다. 그들이 빈곤층이 된 이유를 그들에게서 찾을  아니라, 누구나 빈곤층이  수 있는 사회 구에서 찾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안정된 직업 없이 전전하는 남편을 대신해 복덕방, 화장품 외판원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낸 영자 씨는 가정을 위해 헌신했고, 그 결과로 안정도 확보했습니다. 그렇지만 IMF 위기가 닥치자 해고된 사위와 자식들을 위해 모아둔 돈을 써버려야 했으며, 사업을 하겠다는 아들과 딸을 위해 집까지 팔아 자금을 대줬습니다.

자식들 사업이 실패하고 영자 씨 돈도 바닥나자 더 많이 부양하는 자식과 더 많이 가져간 자식들이 서로 싸움을 벌입니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었고 세 단칸방에 홀로 사는 영자 씨 곁에는 자식도 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끔 연락 오는 자식들 이름이 핸드폰에 뜨면 반가움보단 불길함이 앞섭니다.


많은 자식이 노후보장이던 시절 자식이었고, 자식 수와 몰락확률이 비례하던 IMF 위기엔 부모였던 사람들을 '가난하게 살 이유가 있는' 세대로 단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성공은커녕 적응하기에도 벅찬 사회변화를 버텨 온 사람들이 '지금' 가난하다고 해서 열심히 살지 않았으리라 여기는 건 게으른 추측입니다. 그들은 사회보험 제도가 착하기 전에 노인이 되어버렸을 뿐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늙는다는 게 정상이 된 사회에 먼저 도착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겪는 빈곤을 개인 선택이 빚은 결과물로만 취급하 정작 그 선택을 강요한 시대변화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그들을 짓누르는 노인빈곤율 다음 타깃으로 리를 지목할 테죠.


영자 씨는 격변하는 사회에 떠밀려 극히 제한된 선택지 중 하나로 발을 내디디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듯이요.






종교처럼 여겨지는 믿음이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 모험을 피하며 가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 폐지 리어카와 무관한 노년을 맞으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정리해고, 질병, 불황, 사업실패, 사고, 자연재해, 주기적 패턴을 가진 대공황과 전염병.

그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사회엔 '우리의 열심'과는 아무 관련 없는 경제적 재앙들이 산재합니다. 골목 여기저기에 무심히 쌓여 있는 재활용품처럼, 재앙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곳에 도사리고 앉아 사회 빈곤율 퍼센트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들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문제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이 하나 더 있죠. 우리 모두는 반드시 늙는다는 점입니다.

운이 좋아 노인이 될 때까지 앞서 나열한 문제들을 피한다면 가난해질 확률은 자식과 손주에게로 옮겨가 새로 팅된 룰렛을 돌릴 테죠. '열심히' 살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서도 우리는 가난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할 니다.  가족이 재앙을 피해 기반을 갖추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을까요.  가족들은 이제 '늙어서' 사고와 질병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나를 부양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가난해질 요인 중 하나가 되어버린 니다. 모두가 노인이 되고 모두가 사망할 때까지 이 사이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질병과 사고는 만약이란 글자 뒤에 숨어있는 변수지만 우리가 늙는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실현될 상수입니다. 사회에 필요한  폐지 줍는 노인들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라는 자각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가난해질 요인을 피하지 못해 노인빈곤층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폐지를 워야만 살 수 있도록 내몰지 않는 사회 시스템입니다. 이 사회 시스템이 가진 정체성은 복지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향한 재투자입니다. 매일매일 골목 입구와 출구에서 폐지 줍는 노인을 목격하며 '오늘 성공했다고 내일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하는 불행도를 낮추고, 우리에게 닥칠 늙음과 불행을 조금 덜 걱정하며 살 수 있도록 행복도를 올릴 재투자 말입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31페이지부터 소개되는 <여러 가지 시도들> 단락에서는 일곱 페이지에 걸쳐 각 지자체와 정치인이 진정성 있는 아이디어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죠. 윤영자 씨에게 자식 6명이 있다는 이유(연락을 끊었거나 부양능력이 없음에도)로 복지혜택에서 배제할 근거가 되었던 '부양의무자' 제도는 책이 출판된 이후인 2021년 10월에 기준이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2022년인 올해 78세가 된 윤영자 씨는 소득과 재산이 기준점 아래라는 사실만 인되면 매일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재활용품을 주우러 다니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이가 아플까 염려하지도, 병에 걸려 막내딸인 정숙 씨에게 폐가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니다. 이 변화가 그녀를 빈곤에서 건져낼 수는 없겠지만, 경로당에 앉아 쉴 수 있는 몇 시간을 재활용품 줍는 몇 시간으로 바꿔가며 살지는 않아도 될 니다.  

더 많은 행정가와 정치가, 시민과 언론이 이 문제에 뛰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제도가 가진 모순 하나를 바로잡은 사실만으로 누군가가 사는 하루는 이렇게나 달라지니까요.


오전 5시 30분. 파스를 붙이고 자리에 누워 하루를 계획하던 영자 씨가 보낼 다음 일과를 소개하 글을 맺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수행해야 살아갈 수 있들과 우리가 가진 공통점이듯, 서로를 도우면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음도 들과 우리가 가진 공통점입니다.



유리병이 놓인 자리 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영자 씨를 보더니 말했다. "얼른 오슈. 제가 한 스무 개만 가져갈 테니 어르신이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시오." 영자 씨는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하며 유리병을 주웠다. 그러나 카트에 올려 담기가 힘들었다. 슈퍼 안으로 들어가 사장에게 큰 비닐봉투 두 개를 받았다. 그녀는 마음이 급해 몇 개인 세지도 못한 채, 비닐이 늘어날 정도로 가득 담았다. 그러고는 남은 유리병을 보았다. 열 병 남짓이었다. 남은 것까지 전부 챙겨 가고 싶었지만, 다음에 올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닐에서 유리병 열 개쯤을 다시 꺼냈다. 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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