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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Aug 28. 2022

할 말이 남아 있다



깊이 묻어 잊었던 기억에도 떨 찾아온다. 생각과 후회가 겨울 갯벌로 엉겨 붙은 곳에서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질기게도 왔었다. 녹슬고 뒤틀린 대문 앞에 니가 앉아 있었다. 너는 고집에 잠겨 있었고 너는 수치를 누르고 있었다. 너는 확신에 가득 찼고 너는 혼란에 휘둘렸다. 너는 분해서 울고 있었고 너는 기뻐서 웃고 있었다. 질기게 오던 비가 고마웠다. 흐릿해진 시간을 뛰어넘어 선명히 전해지는 기억은 너를 사랑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목덜미에 뼈가 박히듯 너는 내 삶으로 들어왔다. 니가 내 삶을 바꾸리라 확신했다. 뚜렷한 확신이었다. 흔한 적 없던 확신이었다.



니가 드리워진 나날은 혼돈이었다. 모든 걸 주려는 마음으로 너는 모든 걸 앗아갔다. 너는 나를 숭배했고 너는 나를 짓밟았다. 너는 나를 잠들게 했고 너는 나를 미치게 했다. 너는 나를 삼켰고 너는 나를 토했다. 너와 함께하는 동안 잊었던 날들을 너 없는 시간에 나는 아프게 되뇌었다. 너는 심연이었다. 너는 공허였다. 너는 우주였다. 너는 부토였다. 메마른 언덕 너머에서도, 검고 깊은 바닷속에서도 나는 기어이 너를 찾지 못했다.



눈이 오던 날이었다. 두텁게도 왔었다. 거리를 뒤덮은 눈과 머리 위로 내려앉은 구름 사이를 우리는 걸었다. 너는 처음으로 눈이 성가시다고 말했다. 너는 처음으로 눈이 쓸모없다고 말했다. 너는 처음으로 눈이 더럽다고 말했다. 성가시고 쓸모없고 더러운 눈 위를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깊고 짙은 발자국은 새겨지고 또 지워졌다. 두텁게 내리던 눈이 미웠다. 감정은 흐려지고 욕망은 식어갔다. 시간은 차곡차곡 닳게 했다. 뚜렷한 확신도, 흔한 적 없던 확신도.



사소해서 흘러내린 감정과 구차해서 흩어진 기억이 뒤엉켜 너는 모질게도 단단한 벽이 되었다. 단단한 벽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새하얀 눈은 땅에 떨어져 세상이 되고 새하얀 세상은 바람에 흩어져 눈이 되었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보고 싶어. 마지막 부탁이야.



어질러진 음성 너머에 정돈된 진심이 묻어 있었다. 처음으로 하는 부탁은 마지막 부탁이 되었다.  
사방이 뚜렷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돌아섰고 앞으로 걸어갔다. 사소한 눈이, 쓸모없는 눈이, 더러운 눈이 발에 밟혀 허망한 신음을 내었다. 네게 하지 못했던 말들이 목구멍에 차올랐.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말들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사소한 오해가, 쓸모없는 자존심이, 더러운 감정이 지켜낸 뒷모습은 초라하고 비루했다.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사소한 삶이, 쓸모없는 젊음이, 더러운 시간이 끝장낸 관계는 시리고 또 비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벽은 눈을 맞고 있었다. 길 위로 세상이 쌓이고 있었다. 발자국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 부탁을 이루기 위해 돌아섰지만 나는 할 말이 남아 있다. 죽어가듯 사랑하고 태어나듯 이별했지만 나는 할 말이 남아 있다. 허망한 시간 속에 잠겨 또다시 잊혀져버리겠지만 끝끝내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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