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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Jun 21. 2024

수희 (하)


누가 누구라고 소개할 것도 없는, 넓고 설익은 관계가 마구 섞인 정신없는 모임이었다. 그녀는 친구가 데려온 누군가일 뿐이었고 나 역시 그랬다. 종종 시선을 주고받긴 했지만 이렇다 할 대화 한마디 없는 흔하디 흔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 내린 눈이 그날을 잊을 수 없는 날로 바꿨다.

그날은 일주일치는 될법한 기록적인 폭설이 단 몇 시간 만에 쏟아진 뒤 거짓말처럼 그쳤었다.

창문을 새까맣게 선팅한 변두리 술집에서 세상모르고 놀던 우리 일행은 들어갈 때와 완전히 달라진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사라진 거리엔 차는 물론 사람 한 명 다니지 않았다. 허리까지 솟 땅에 1미터 깊이로 박아놓은 듯한 가로등과 전봇대가 없었다면 거기가 어딘지도 구분 못할 지경이었다. 구름 물러간 쪽빛 밤하늘과 대비되어 하얀 세상은 더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은 우리는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눈 쌓인 도로'가 무슨 의미인지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쌓인 눈길을 술 마신 몸으로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 머리를 맞대고 경로를 궁리하자니 일행 중에선 그녀와 나만 같은 방향이었다.

차도 행인도 없는 완벽한 적막 위에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커다란 달이 둥실 떠 있었다. 눈을 헤치며 걷느라 길게 이어지는 대화는 하지도 못했다. 간혹 내뱉는 우와, 저것 봐. 우와, 저것 봐가 전부였다. 몰아쉬는 숨결을 타고 길게 뻗어나가는 입김과 꾸드득 발자국 소리와 우와 저것 봐가 눈의 세상을 채웠다. 형형하고 시린 달빛이 하얀 대지를 솜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양말이 다 젖어 손발이 꽁꽁 얼고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음에도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에 우리는 들떠있었다. 눈아래 지형이 쑥 꺼지는 바람에 내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자 그녀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넘어지면서 무심코 내뱉은 '아이구 진짜'가 할아버지 말투 같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는 웃을 일이 있으면 입을 활짝 벌리고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있던 술자리에선 그런 식으로 웃지 않았다고 넘어진 채로 지적하자 그녀는 또 한 번 큰 소리로 웃어댔다. 달빛을 머금은 하얀 대지위로 뻗어나간 청량한 웃음소리가 어딘가에 부딪쳐 메아리로 돌아왔다. 잊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처음 만난 날엔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 길 고양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말했다.

"내가 우유를 주면 내 손을 핥고 다리를 부비며 체취를 남길 테지만"

그녀는 말했다.

"내가 손을 뻗어 만지려 들면 물러서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손을 'ㄱ'자로 만든 뒤 눈높이로 들었다.

"처음엔 이만큼 높은 벽이 있었지. 자기가 보여주는 만큼만 볼 수가 있었어. 편안하고 유쾌한 모습이지."

가슴높이로 손을 내렸다.

"여기까지 내리는 건 쉽진 않았지. 마음을 열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어야만 몰랐던 면을 보여주었으니까. 사려 깊고 진지한 모습이지."

손바닥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재미있고 긍정적이야. 어떤 주제를 꺼내도 대화가 통할만큼 관심사도 많아.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핀포인트로 다정해.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났을까 싶을 정도지. 하지만 그런 면들이 가리고 있는 커다란 공동空이 있어. 쓸쓸하고 낙담한 모습이지. 자기가 결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라서 알아채는 사람은 드물지만 나는 알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인간관계의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자기는 진심을 보관해 둔 그늘 속으로 사라져. 골목을 지나 지붕을 넘고 담벼락 위를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으로."

오래전에 책에서 '인디언의 동굴'에 대해 읽었다. 인디언 마을에선 부부가 싸우면 남자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규칙은 간단하다. 남자는 어둡고 차가운 동굴에 홀로 머문다.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내기 전까지는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는 동굴에 들어가된다.  

나는 그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동굴'을 마련해 두고 크고 작은 동요가 찾아올 때마다 그 안에 머물렀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 동굴에 대해 얘기해 왔다. 그녀가 말하는 진심을 보관해 둔 그늘 속이란 그 인디언의 동굴을 말하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어째서?"

"어떤 경우엔 상처받기 싫어서, 어떤 경우엔 상처 주기 싫어서 동굴에 들어가는 거야."

"동굴" 그녀는 말했다. "그 인디언의 동굴."

"그 인디언의 동굴."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원래의 배우자가 돌아오고 찾으러 들어가면 용이 불을 뿜어댄댔었지."

"맞아."

"그 '동굴'에 들어가는 행동이 자길 싫어하게도 하고 나 자신을 싫어하게도 해. 알겠어? 상처를 피하려고 하는 행동이 상처를 남기는 거야. 상대가 느낄 감정은 생각하지 않는 거야? 사랑하는 존재에게서 철저히 배제되는 소외감 말야."

"동굴을 찾을 상태라면 거기까지는 생각 못하지 않을까."

"언제 돌아올지 모를 사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무력감은 어때? 그런 것도 관심 없어?"

"동굴 안에 있을 땐 내 감정에만 집중해."

"자기에게 상처 입혔다는 사실에 상대가 느낄 죄책감은? 그것도 관심밖이야?"

"동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어디서 뭘 하는지 뻔히 아는데도 사라진 사람 취급을 해야 하는 거지? 그 황당함은 어떻게 생각해?"

"정신 차려. 그놈은 허깨비야. 진짜 나는 동굴 속에서..."

"동굴 따윈 쥐똥만큼도 관심 없어. 동굴이 뭘 어쨌단 거야!"

다른 사람들과 주인이 이쪽을 힐끔거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 모든 일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모습을 보인건 처음이었다. 내 방식을 감싸려다 다른 이의 방식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나는 수치스러웠다.

"미안해. 빈정대려던 건 아냐."

하아.

천장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쉰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들고는,

"자기랑 왜 헤어졌는지 기억났어."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짤랑. 문에 달아둔 종이 힘없이 울렸다.

또 한 번 흘러가는 만남과 이별을 얘기했으니 오늘까지 '네 번'이다. 네 번이나, 그녀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마음을 써주었다. 그리고 나는 보잘것없는 방식 하나를 변호하자고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 나를 걱정해 동굴 속에 들어와 준 사람에게 불을 뿜어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창밖을 보았지만 가로등이 닿는 곳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했으므로 나는 더욱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나를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그녀는 헤어진 후에도 내 친구로 남아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헤어지게 된 이유 역시 그녀가 나를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들여다보고 돌봐야 나는 내 방식을 고칠 수 있을까. 내가 그걸 원하긴 할까. 두터운 구름이 운하처럼 느린 속도로 밤하늘을 흐르고 있었다. 르게 물들어가는 밖 세상을 나는 의미도 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눈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런 태도를 보여서 미안하다고, 나는 다시 사과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건지 알아."

담배는 테이블에 놓았지만 라이터는 놓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나는 하얀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라이터를 바라보았다.

"기분에 얽매이는 것도 싫어서 내버려 두는 사람이 남의 기분챙기려면 얼마나 많은 너지를 소모해야 할까, 나로서는 짐작조차 안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에너지에 잘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이야 나는. 나를 향한 마음에 무뎌.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핀포인트로 다정하려면 그 사람이 포인트 알고 있어야 해. 그래야 피할 수 있으니까. 상대가 대화하고 싶은 주제를 얘기하려면 상대가 결코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도 파해야 하고. 대함은 배신을, 진지함은 조롱을, 유쾌함은 모욕을 중력처럼 끌어들여. 사람들 장점은 다 그런 식이야. 빛날수록 더 깊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 내 그림자는 상대를 면밀히 이해하는 만큼 상대방이 쏟는 마음에 반응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네가 말한 '상대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무관심한' 태도는 그런 을 가지고 있어. 깊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 공감도 하지 않는 거야. 고통스러우니까.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점점 더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 그래서 납득하기로 한 거. 노력과는 별 상관도 없이 흘러가는 관계를. 하지만 그런 사정으로 의도치 않은 일들이 생겨. 오늘 같은 경우엔 널 화나게 한 거지. 미안하게 생각해. 진심으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그녀는 또각 소리를 내며 라이터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태도야."

그녀는 말했다.  

"체념하는 태도지."

그녀는 말했다.

"분쟁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는 태만 추구하지. 체념하고 돌아서고 사과하지. 화내고 싸우느니 그냥 사라지는 거야. 있지도 않은 동굴얘기나 하면서. 그렇게 재미있고 다정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뒷모습만 보여주는 거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안개 같은 뒷모습을. 그걸 바라보는 사람이 어떤 감정일지 생각해 봤어? 아, 동굴 안에 계시느라 모른다고 했지? 내가 말해줄까? 동굴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개자식이라고 생각해. 화내고 싸우다음 레벨로 관계를 진행시킬 기회를 날려먹는 짓을 하니까.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돌? 나무? 그게 뭐든 헛소리니까 머릿속에서 지워. 자기는 사람이고 사람은 화내고 싸우고 실수하면서 성장해. 알겠어? 동굴이니 뭐니 다 헛소리란 말야. 자기 머릿속에 있는 동굴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더 특별한 우리가 될 수 있는지 가보지도 못했어. 망할 놈의 동굴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으니까. 그게 자기한테 어떤 존재라는 건 알아. 감정을 보호하고 돌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준다는 걸. 그래서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존중했던 거야. 하지만 말야, 그 동굴은 이제 자기를 잡아먹고 있어. 그걸 필요로 하는 마음만큼,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만큼 다른 사람들에게선 흐릿해지고 있는 거야. 그러다 어느 날이 되면 없던 사람 같은 존재가 되겠지.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본인도 상처받지 않는 연기 같은 인간. 정말 그걸 원하는 거야?"  

동굴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 물건을 쌓아둔 다락방 같은 존재였다. 내가 그곳에서 받는 위안만큼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게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할게."

"사과하지 말고 화를 내. 남의 본심도 모르면서 왜 함부로 이야기하느냐고 화를 내. 체념하고 물러서 말고 나를 대면하고 화를 내란 말이야."

하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에겐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친구였고, 내게 필요한 말을 해주는 친구였다.

헤어진 그녀에게도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욕망에 솔직한, 직선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내게 다가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짧고 선명한 형태로 떠났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화내고 싶은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는 빈약한 경계를 지키지 못해 늘 누군가와 이별을 했고 실망과 고독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기어이 사랑에 빠지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어."

"뭐?"

"헤어진 사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잖아."

그녀가 대답하지 않기에 나는 계속 말했다.

"신변상의 문제가 엉키고 꼬여있어 지켜보는 사람조차도 고통스러울 지경이었어.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터지고 그게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곤 했어. 그녀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말이야. 나는 곁을 지키며 이야기를 듣거나 떠는 몸을 안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퉁퉁 부운 눈으로 새벽에 날 찾아오 모습을 보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치고 피곤한 으로 안겨있던 그녀는 푹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모습으로 돌아갔지. 제나 그게 안쓰러우면서도 놀라웠어. 나라면 결코 그렇게 지낼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참 강한 사람이었지. 그렇게 하루하루가 어떻게든 흘러갔어. 우리는,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힘들면서도 행복했지. 돌이켜보면 그녀의 상황이 나빴기 때문에 내게 더 집중한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 내가 제공하는 평범한 행복마저 특별하게 다가갔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여름은 가을이 되고 가을은 겨울과 봄을 향해 흘렀지. 그녀를 둘러싼 문제들도 츰차츰 해결이 되었고. 그렇게 둘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구름에 파묻힌 새까만 거리를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녀를 둘러싼 문제들이 거의 다 해결되었을 때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어. 이 사람을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동굴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 사람과의 이별은 어떤 형태일지 상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걸 깨닫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그 두 가지는 없는 편이 좋으니까. 하지만 물방울이 남긴 자리엔 그림자가 생기고 그림자는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어. 불안해지기 시작했지. 내 원칙은 왜 그녀를 향해서는 다르게 작동하는가. 그녀가 대체 뭐가 다르길래. 결론이 분명해서 나는 더 혼란스러웠어. '다를 것이 없다' 였으니까.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거든. 물론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앞서 말했듯 강했고, 나를 깊이 사랑해 주었지. 하지만 그녀가 가진 특징이 무엇이든 나를 바꾸진 못해. 당연하잖아. 그런 식이라면 나는 진작에 누군가에게 정착했겠지."

내 앞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사람을 바라보았다. 감탄이 나올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나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지만 초점은 불분명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어디쯤을 더듬고 있는 걸까.

"작았던 진동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지. 이번엔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서였어. 상대가 특별하지 않은데 어째서 이 관계는 특별한가. 이번에도 결론은 간단했지. 달라진 건 상대가 아니라 내 상황이었어. 정착해야 하는 나이. 정착해도 되는 조건. 정착하고 싶은 욕망."

그녀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치고 흐릿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더 소중한 줄도 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생의 황금기를 걷는 나이임에도, 열병을 앓는 아이처럼 허상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를 혐오했어. 네 말대로 동굴이니 뭐니 다 헛소리였던 거야. 사라질 구실에 지나지 않았지. 물러서고 등을 보이면서 나는 상대뿐 아니라 나 자신마저도 기꺼이 단념하면서 살아왔어.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지만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어.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관계의 본질이라면 그녀가 굳이 그녀일 필요도 없었을 테지. 나 자신을 저열한 인간이라고 느꼈어. 나 역시 그저 그런 시시한 인간들 중에 하나였지. 필요해서 만나고 필요해서 머물고.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만남이든 이별이든. 근데 다 헛소리였어. 나 역시 상황에 휘둘리고 있었을 뿐이야. 외로워서 만나고 때가 되었으니 정착하려고 들지. 그렇게 생각하니  허무해졌어. 그녀를 향한 사랑은 문으로 변질됐지. 그녀뿐 아니라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허망한 날들이었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결국, 누구와도 사랑하지만 누구와도 헤어지는 인간이었던 거야. 수 가지  사랑 빠지지만 이별할 땐 이렇다 할 이유 하나 없어. 한 곳을 폐허로 만들고 나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거길 폐허로 만드는 자연재해나 다름없지. 그런데 이제 와서 영문도 모르는 사람에게 슬그머니 정착하겠다고? 도대체 내가 무슨 염치로...!"

목소리가 몹시 떨렸기 때문에 나는 말을 멈추었다.

인디언의 동굴 이야기엔 짧고 친절한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동굴에 들어가는 행위에 의미나 목적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음을 표현하기 위해 동굴을 이용하는 경우 있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확신이 없을 때도 나는 동굴을 찾았다. 동굴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말았다. 가이드라인을 어긴 것이다.

"결국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기로 했어. 나 자신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거야. 다른 이유긴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아. 단념하기로 한 거지... 고작 그런 인간이 대체 누구에게 화를 내겠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채우고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채우고 비웠다. 그 동작은 간결하고 무심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가사도 멜로디도 익숙했지만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제목은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확실히 해둘게 몇 가지 있는데." 그녀는 말했다.

"첫째, 결과랑 관계없이 자기랑 보낸 시간은 내게 소중해.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서 중요한 기억 몇 개만 간직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도 난 그 기억을 선택할 거야. 그러니까 당사자 허가도 없이 '허망한 날들'로 규정짓지 마. 또한 보다시피 나는 조금도 폐허가 되지 않았어.

둘째,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가 특별했다는 증거야. 자기가 무슨 통찰을 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든 그녀는 중요한 방아쇠였어. 그걸 인정해야 해. 그리고 그런 사람과 사계절동안 행복했던 게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입증해. 그녀와 이별한 걸 납득하기 위해 스스로를 혐오하지 마.

셋째, '그저 그런 시시한 인간들'을 매도하지 마. 다들 필요해서 만나고 필요해서 머물러. 다들 화내고 싸우고 상처 주고 상처받고 욕망하고 실망해. 그게 뭐 어때서? 오히려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이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사람이 돼서 뭣하게? 더 깊이 고립되는 거 말고 뭘 할 수가 있는데 그런 사람이 돼? 무슨 염치로 정착하냐니, 정착하는 데 무슨 염치가 필요해. 사랑하고 살아가는데 무슨 놈의 염치가 필요하냔 말이야.

시시하게 살아도 괜찮아. 시시한 사람 만나서 별것도 아닌 일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도 괜찮아.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야. 술 마시다 심심해서 말을 걸기도 하고 눈이 잔뜩 내려서 사랑에 빠지기도 해. 작년엔 키 큰 사람을 사랑했지만 올해는 상냥한 사람을 사랑해. 헐렁한 정장 같은 관계도 있고 낡았지만 몸에 딱 맞는 셔츠 같은 관계도 있어. 복잡하면 복잡해서, 간단하면 간단해서 결국은 시시해.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세상이 있어.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음식, 책, 풍경만 공유해도 빛이 변하는 세상이야. 사소한 몸짓, 사소한 접촉,  사소한 눈빛만으로 출렁이는 세상이고. 자기가 오래전에 잊어버린 세상이지. 우연히 듣게 된 멋진 노래 한곡이 자길 기쁘게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 더 멋진 노래를 찾는 대신에 한 곡만 질릴 때까지 듣던 시절 말이야. 저기 어딘가에서 자길 기다릴지도 모를 특별한 존재를 찾느라 지금 즉시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 것들을 내버려 두지 마. 자기가 찾아낸 모든 특별한 것들이 빛바래 시시해진다는 건,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시시한 것들이 결국은 특별해진다는 뜻이야.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누군가의 가족과 그가 마시는 마지막 숨 한 모금처럼.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관계만 찾느라 비참해지지 마. 별것도 아닌 행복불행에 반응하는 시시한 사람들과 함께 해. 삶을 이끄는 건 특별한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삶을 완전하게 하는 건 시시한 삶을 사랑하는 태도야."


잊을 수가 없던 그날.  눈을 헤치고 집에 도착했지만 그녀의 집은 한참 더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기서 더 걸으면 난 틀림없이 골목 어딘가에 엎어져서 죽을 거야. 그리고 이 아름다운 눈이 다 녹은 뒤에 동태처럼 꽁꽁 얼어서 발견되겠지. 이건 농담이 아냐."

라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방향만 같을 뿐 그녀의 집은 멀쩡한 길이었어도 우리 집에서 상당한 거리였다. 형과 둘이 살았지만 형이 귀가하지 못하니 (그 역시 눈 문제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편한 옷과 침대를 내어줄 테니 그녀만 괜찮다면 자고 가라고 말했다. 나는 형 방에서 자면 된다고 하자 그녀는, '굿 잡'이라 앞장서서 걸었다.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느라 어색하게 차릴 격식도 사양할 체면도 없었다. 더구나 남자 둘이 살던 집 냉장고엔 차가운 맥주가 가득 차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남녀가 밀고 당길 긴장감 따윈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틀이 어긋나 삐그덕 대는 대문을 열고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번갈아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과자와 맥주를 올려둔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웃고 또 웃어댔다.

불 좀 꺼봐.

집안 온도와 취기 탓에 답답했는지 그녀가 말했다.

불을 끄자 거실로 걸어간 그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거실을 넘어 주방까지 직선으로 달려왔다. 창틀에 기댄 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달빛을 빨아들인 하얀 입김이 그녀에게서 거실로, 거실에 내게로 번져왔다. 어두운 집안에 그녀가 기댄 창틀만이 액자처럼 떠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나를 보았다. 달빛 때문에 내쪽에선 그녀의 실루엣만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보는 내 표정이 어땠을까. 그녀는 훅, 하고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숙이고 끅끅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이 되었다. 그날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기억뿐이다.


"받아들이 걸 넘어 이젠 고독을 원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렇게 깊이 사랑했는데도 결국 헤어졌어. 이번 이별은... 그런 의미에서 아팠어.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는 쪽을 택하는구나. 그것 말고는 답이 없는 것처럼."

삶이 강물처럼 나를 품고 흐른다. 작은 도랑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개천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된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거라는 걸 알아도 결국 그쪽으로 향하지 못하겠지. 그걸 받아들이는 게 고통스러웠어."

강이 깊고 넓어지 유속 느려진다. 급류가 줄어들고 소나기에도 적응하는 시기가 오면, 사람은 자기 강이 어디로 향하는지 차츰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인 걸까."

그녀곁으로 다가와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 모두 행복할 자격이 있어. 자기는 선택을 했을 뿐이야. 이 어딨겠어. 그저, 실컷 화내고 싸우는 거야. 시시한 사람이 되어 멋대로 망가지는 거야. 다른 누군가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지독하게 화를 내."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나선 용서해 주는 거야."


우리는 술을 다 마신 후에도 흘러가는 구름과 음악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밤중에 전화해 헤어진 남자 타령하면서 울어버릴지도 몰라. 괜찮지?"

"내가 어떻게 대답해도 전화할 거잖아."

"그야 그렇지."

그녀는 팔을 뻗어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사라졌던 고양이가 어두운 골목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고양이는 우리를 견하 멈춰 서더니 그 자리에 앉아 뒷다리를 핥아댔다.

"언젠가 자기와 함께 할 사람을 위해 좀 더 자신을 아껴 것. 신중하되 너무 진지하지 말 것. 술은 적당히. 체온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몇 날 며칠이라도 안아줄 수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잘 알겠어."

누군가에겐 폭죽을 터뜨리듯 간단하지만 누군가에겐 뻘 속에 잠기듯 고통스러운 이별. 누군가에겐 옆테이블로 걸어갈 용기만 있으면 되지만 누군가에겐 기나긴 이별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사랑.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너와 난 아득한 행성 저쪽과 이쪽에서 대화하는 것 같아"

길게 내쉬는 그녀의 숨이 셔츠  스며들었다.

"누구나 그래. 다들 먼 행성에서 이야기하는 거야."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참 동안 수희 앞에 서 있었다. 두터운 구름이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는 시력이 좋기 때문에 멀리 볼 때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이젠 공연히 미간을 찌푸리며 초점을 조정하는 시늉을 한다. 헤어진 그녀가 내게  버릇이다. 계란후라이 하나 예쁘게 부쳐내지 못할 만큼 요리엔 재능이 없지만 오므라이스는 꽤 그럴듯하게 만든다. 언젠가 사귀었던 요리사 여자친구가 바보도 따라 할 수 있는 레시피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대화할 때 몇 초쯤 기다렸다가 대답하는 버릇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버릇도, 한 줄짜리 질문일기를 매일매일 쓰는 버릇도 누군가남기고 간 흔적이다. 입을 활짝 벌리고 큰 소리로 웃는 버릇은 조금 전까지 나를 안고 있던 사람이 남겨주었다. 그리고 나를 놀리기 위해 흉내 내던 '아이구 진짜'는 이제 그녀의 말버릇이 되었다.

소중한 기억을 몇 개만 간직해야 한다면 나 역시 그녀와 보낸 시간을 선택할 것이다. 그녀가 옳았다. 우리가 나눈 시간은 결코 '허망한 날들' 따위가 아니었다.

내게 머물러 내 일부가 된 흔적들처럼, 로부터 흘러간 흔적들 누군가에게 남아 버릇이 되어 주었을까. 전에 없던 생소한 행동이나 말투를 발견하는 날, 군가는 그 흔적의 기원을 잠시나마 더듬어 볼까.

 사람은 그 기억을 어떻게 생각해 줄까.

"적어도 허망한 날들은 아니었기를."

빗방울에 번져가는 거리와 간판불빛을 보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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