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였던 날들도 그렇습니다

by 봄날의 윤슬



가라앉은 고요가 무거워 잠을 깹니다
가득 찬 허공을 먹먹히 바라봅니다
나는 또 가만히
당신이 궁금합니다

하루가 거친가요
날 끝 같은 시간이 어제로 흘러가지 않나요
베갯잇을 누르던 창백한 새벽은
호흡 한 모금 머물지 않던 런 오후는
오늘도 그대론가요

나는 찮습니다
멍하니 어둑하니 고장 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잊었습니다
오랫동안 각해야 당신이 떠오릅니다
손잡고 거닐던 유채꽃 거리도
기대 머물던 바람 불던 언덕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갑니다
없던 나날처럼
오지 않았던 나날처럼
내게는 모든 게 흐릿합니다
애도 쓰지 않고, 나는 당신을 잊어갑니다
망각은 사랑만큼 답니다
망각은 사랑처럼 답니다
망각은 사랑보다 답니다


아니
거짓입니다


나는 당신과 비슷한 글자 하나만 보아도 우리였던 날들을 떠립니다
망각은 조금도 달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잊지 못합니다

길을 걷는데 처음 보는 고양이가 발등에 볼을 부볐습니다
체취를 남기려는 듯 다정히도 부볐습니다
고양이가 볼을 부비기만 해도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아요
당신이 사랑해 줄 땐 더했겠지요
고양이가 떠난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계절 옷을 정리하다 손수건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하얀 목에 감곤 했던 병아리색 손수건입니다
당신이 유난히도 좋아하던 내 파란 코트 안주머니에 있었습니다

어떤 시간은 떠나지 못해 고입니다

어떤 시간은 버리지 못해 섞입니다

오늘 신은 헐렁한 슬리퍼를 어제였던 당신이 못마땅해하고

오늘 먹은 귀한 음식이 어제였던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다 씻겨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였던 날들이 많이 엉켜있습니다
질기게도 엉켜있습니다

먼바다에 해무가 짙습니다
짙은 해무 너머 뱃고동이 긴 소리내 웁니다
당신도 듣고 있나요
새벽이 방안을 떠나지 않는 날
나는 바다 밑에서 잠을 청합니다
천장 같은 수면에 달빛이 일렁입니다
감싸 쥐지 못하니 따뜻함마저 서럽습니다
당신도 듣고 있나요
뱃고동과 새벽은 둔하고 잔인합니다

나는 당신이 처량합니다
처량한 당신이 그립습니다
우리였던 날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아직 거기에 있을까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려 하니 이제 어디에도 없을까요

나는 내가 미련합니다
미련한 내가 미워 죽겠습니다
깍지 낀 손에 고였던 땀방울이 방금인 듯 애틋합니다
목덜미를 적시던 더운 숨결이 곁인 듯 달콤합니다
달아올라 꽃피던 뺨이

말굽처럼 두드리던 심장이

여운 속에 사위던 눈동자가

함께인 듯 달뜹니다

나는 사랑만 할 줄 압니다
사랑만 할 줄 알아서 아무나 사랑합니다
아무나 사랑하다가 아무한테나 상처받습니다

아니

거짓입니다

나는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랑을 할 줄 몰라서 아무나 사랑합니다
아무나 사랑하다가 아무한테나 상처받습니다
처량한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는 이렇게 미련합니다

우리였던 날들도 그렇습니다
처량하고 미련합니다
갈라 터진 입술에 머무는 노을 같습니다
실컷 울고 내쉬는 한숨 같습니다
괜찮 괜찮 되뇌이는 심 고동 같습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우리였던 날들이 들물처럼 차오르는 날

나는 돌무더기 언덕에서 몸을 웅크립니다
먼 하늘이 눈앞까지 내려와 도각도각 부서집니다

맥없는 숨이 멀리 희미합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나는 속절이 없습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나는 하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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