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지 30년도 더 된 13평짜리 아파트다. 동네도 후지고 노친네들 천지라 폼은 안 나지만 손바닥 만한 창문 하나 달린 닭장 같은 고시원에 비한다면야 가히 유토피아라 부를 만하다. 비바람 맞아가며 밤새 죽어라 배달 뛰어봐야 영감탱이 병원비로 꼬라박고 나면 수중에 몇 푼 남지도 않는데 그 와중에 애비라는 작자는 빚쟁이들을 헨젤과 그레텔 속 빵부스러기처럼 흘리고 다녔다.
고작 21년을 살았는데 21만 년을 윤회의 고리를 타고 떠돌아다닌 기분이다. 팔자가 더럽다는 소리다. 그런 나에게 팔자 펴는 일이 생겼다. 사실 이 정도로 굽었던 팔자가 쫙 펴졌다고 하기엔 존심이 상하지만 어쨌든 한숨은 돌리고 비빌 언덕은 마련됐으니 마음에 여유라는 게 좀 생겨난다.
집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가구와 가재도구를 다 들어내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짐들도 모조리 정리했다. 청소업체에서는 벽지와 장판까지 다 뜯어내고 살균소독을 하는 게 좋다고 했지만 돈이 아깝다. 대충 살다 보면 대충 살아지겠지.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거실 이쯤이다. 이쯤 작은 소파 위에서 잠이 든 듯 얌전한 자세로 죽어있었다고 했다. ‘화냥년’. 아버지가 술을 마실 때마다 상소리를 섞어 저주를 퍼붓던 그 화냥년이 겨우 여섯 살이 된 내 손을 뿌리치고 대문 밖으로 내달리던 그날 밤을 또렷이 기억한다. 갈고리달이 음험한 기운을 내뿜으며 내게로 돌진하는 것만 같았던 그날 밤 내 어머니는 화냥년이 되었다.
기억은 또렷했지만 감정은 사그라들었다. 미움도 원망도 애정도 그리움도 없었다. 찾을 생각도 없었고 찾아오길 바라지도 않았다. 새끼 버리고 욕정에 눈이 멀어 뛰쳐나간 여자, 는 내 인생 밖의 문제였다. 빌어먹을 내 인생에는 산재한 문제들이 발길에 차일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랬는데 내 앞으로 이 집을 남겼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아파트 하나 없는 실패자로 살지 말라고 이 다 쓰러져 가는, 코딱지 만한 아파트를 남긴 것인가. 고맙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못했던 에미 노릇쯤은 이 한 번으로 퉁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디선가 슴슴한 청국장 냄새가 흘러든다. 때를 잊은 송장꽃이 피었나 보다. 오른쪽 눈물샘에서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내리고, 그나저나 뷰는 개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