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을 피해 달아난 지 사흘째다. 놈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골목 구석구석 어둠에 스며들었다. 이럴 때 도시란 참 좋은 곳이다. 건물이 많고, 건물 사이 틈이 많고, 틈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많고,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많고, 많고 많다. 그 많은 인간 사이에 섞여들면 놈도 나를 찾아내기 수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오늘 밤은 시의 변두리 원룸촌에 자리한 4층짜리 빌라 틈 사이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 절대 잠들면 안 된다. 잠이 드는 순간 놈의 그악한 손아귀가 내 경추를 작살내버릴 지도 모른다. 4월의 밤바람은 여전히 모질다. 푸석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해본다. 수염이 까칠하게 올라왔다. 손에 닿는 그 감촉이 좋다. 뾰족뾰족 장난 같은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순간 소름이 돋으며 선득인다. 앞섶을 추슬러 보지만 의류 수거함에서 대충 꺼내입은 여름용 재킷으로는 도리가 없다. 망할, 내가 먼저 그 새끼를 죽여버릴까?
놈은 20년 전 처음으로 나를 찾아냈다. 스무 살, 그 찬란했던 시절에 대학 교정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그놈을 보았다. 놈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해 있었고 눈 속에는 거만한 관조의 빛이 번뜩였다. 한여름 일광에 순간 아득해졌던 정신을 붙잡고 다시 놈을 찾을 때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 놈은 잊을 만하면 나타나고 나타났다. 첫사랑과 공원 벤치에 앉아 밀어를 속삭일 때도 멀찌감치 서서 예의 그 거만한 미소를 흘렸고,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원에서도 칠판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놈은 지리산 골짜기에도, 남도 끝 무인도에도, 와이오밍 옐로스톤에도, 어디에나 있었다.
놈이 출몰하지 않는 곳은 단 한 곳. 집뿐이었다. 5년 동안 놈에게 시달렸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안에 틀어박혔다. 모든 관계는 와해되었고 일상은 무너졌으며 청춘은 송두리째 화형당했다. 그렇게 15년을 두 평 남짓한 방안에 유폐된 나의 영혼에서는 썩은 내 나는 진물이 뚝, 뚝, 뚝,
사흘 전 잠결에 한기를 느끼고 눈을 뜬 순간, 그놈의 안광을 맞닥트렸다. 놈은 침대 왼편에서 허리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의 얼굴이 맞닿을 지경이었다. 그토록 가까이서 놈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뻣뻣한 모질의 쳐진 눈썹, 커다랗고 퀭한 두 눈, 기다란 인중 아래 볼품없이 늘어진 얇은 입술까지. 저건 나다, 생각한 순간 놈의 손아귀가 목을 휘감으려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집 밖으로 내달렸다. 발바닥 아래로 아스팔트의 냉기가 선득선득 혈관을 타고 올랐다. 숨어야 해. 그림자를 찾아. 어둠을 찾아. 완전한 암흑이 되어야 해. 도시의 빌딩들 사이로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