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서 길을 잃은 바람이 어수선하게 떠다니며 햇살의 온기를 흩어내는 늦은 오후, 따뜻한 호텔 방 안에서 나른한 기분이 되어 상념에 잠겨 든다. 오늘 오전 법원에서 마주한 남편의 얼굴은 해쓱했다. 잠깐 연민의 감정이 일었으나 고개를 한번 휘젓자 그마저도 일순간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그것이 그에게 남은 내 마지막 감정의 조각이었을 것이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감포 바다의 물결은 잔잔하다, 그 물결 마디마디로 타다 만 태양의 부스러기들이 부유하며 반짝거린다. 넋을 놓고 그 반짝임을 눈으로 좇는다. 왜 하필 경주였을까? 제대로 식도 올리지 못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하며 남편은 약속하곤 했다. 기반이 좀 잡히면 경주로 신혼여행을 가자, 아이들이 좀 더 크면 경주로 가족여행을 가자. 그러나 그는 늘 밖으로 나돌았고 언젠가부터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이혼서류를 접수하자마자 KTX를 타고 경주로 내달린 건 무의식 속에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원망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았기 때문인가. 그 해묵은 원망이 안쓰러워 눈가가 시큰거린다.
내가 처음 이혼을 선언했을 때 남편과 자식들은 이유를 궁금해했다.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어서, 라는 나의 대답에 그들은 모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그 나이에 무슨 사랑 타령이야, 딸은 기어코 비수를 꽂았다.
그럼 뭐 사랑은 니들만 하는 거냐? 통박하고 싶었으나 어물쩡 입을 다물고 말았다. 퇴직 후 삼식이가 되어 나를 종년 부리듯 하는 네 아버지를 더는 참아줄 수가 없다고 말할 걸, 잠시 후회도 했다. 사랑이라니....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랑하지 않는 채로 남은 생을 함께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순간 순간 닿는 남편의 체온이 생판 남의 것보다 더 낯설어져서.
왼손 약지에서 두돈짜리 순금반지를 빼낸다. 손 마디가 굵어 잘 빠지지 않는다. 너도 40년 동안 빛을 잃고 말았구나. 그간 고생 많았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의 향연 속으로 돌려보내 주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창을 연다. 황혼빛에 물든 윤슬이 애잔히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