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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희 Apr 18. 2023

소나기




  습한 강바람에 얹혀온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순식간에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흔들어 깨웠다. 멀리서부터 퍼붓듯 쏟아지는 비의 장막은 마치 비극의 클라이맥스와 같다. 후드득후드득 내리꽂는 굉음은 심장을 옥죄어 오는 진혼곡이 되어 울렸고 척척한 습기는 기분 나쁜 이물이 되어 온 몸을 훑었다. 곧 그것이 온다. 이가 덜덜 떨리고 팔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냈다. 어둠만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나의 세상 속에서 어둑시니로 살았다. 그러다 두 평짜리 작은 내 방에서 꿈틀대는 어둠이 빛을 가르고 세상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는 망상에 사로잡혀 히죽거리곤 했다. 

 

   “방금 들어온 속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십 분 전 전국 곳곳에 국지성 호우가 쏟아졌습니다. 비는 금방 그쳤습니다만 그 시각 비가 내린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 수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고 사망 원인 또한 불명인 상황입니다. 자세한 소식은 더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후에도 소나기는 산발적으로 쏟아졌는데 예측할 수도 없고 대응 방법도 알 수 없는 현상에 각국의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빗물의 성분을 검사했으나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분진 등이 포함된 해수였다. 그런데도 비를 맞은 사람들은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종말의 전조라고 했다. 신이 마침내 인간을 심판하기로 작정했고 바이러스 창궐 이후에 곧 대홍수가 일어날 것이라고도 했다. 


  사고가 있던 날,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마침내 내 그림이 인정받아 유명 동화작품의 삽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오랫동안 만나온 연인에게서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러나 환열이 넘치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불행을 예비하여 조심조심 발끝으로 삶을 디디며 살아왔건만 순간의 방심을 귀신같이 알아챈 불행은 여지없이 내 삶을 박살냈다. 음주운전이었다. 운전자와 약혼자는 즉사했고 나는 세 번의 큰 수술을 받아 겨우 살 수 있었다. 양쪽 눈의 시신경은 끊어져버렸고 그렇게 가없는 어둠의 나락으로 밀쳐졌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사신이 몰고오는 심판의 소나기를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 실명 후 혼자 하는 외출은 처음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했지만 거의 기다시피 해서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설 수 있었다. 현관 계단에 앉아 몇 날을 기다렸지만 비는 내게로 와주지 않았다. 

 

   “오늘 오후 세 시경 서울시 도곡동, 부산시 양정동, 청주시 금천동 등지에서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최근 죽음의 소나기를 찾아 나서는 자살 시도자들이 증가하는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아파트 현관 계단에 나가 앉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조차 나를 피해 다른 이들에게만 시혜를 베푸는 듯했다. 용기를 내 아파트 단지 앞에 자리하고 있는 수변공원까지 나가 보기로 했다. 막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원 벤치에 한참을 앉아 늦은 여름의 짙은 풀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며 좋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레 내 팔을 잡더니 무엇인가를 오금 부분에 걸어주고 서둘러 떠났다. 커다란 우산이었다. 


  “죽음의 소나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기를…….”



  오늘 소나기는 바로 내 등 뒤까지 쫓아왔다. 느닷없이 풀냄새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의 냄새를 좇아온 생(生)이 부질없는 희망을 부채질했다. 살고 싶었다. 


  때마침 내 머리 위로 무지갯빛 우산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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