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린의 원룸은 냉기로 가득했다. 문밖에서는 라일락 꽃향기가 따스한 봄바람에 얹혀 넘실거리고 오월의 투명한 햇살이 연둣빛 잎사귀들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데, 해린의 집은 겨울 한복판에 놓여있는 듯 어둡고 추웠다. 나쁜 년. 분명히 수술 후에 들러 쉬어가겠다고 전했는데 보일러도 켜놓지 않았다. 하긴 뭐 장한 일 했다고. 창문을 열자 온기를 품은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제야 옹송그렸던 어깨가 툭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삼계탕이나 한 그릇 사 먹을까 하다가 이마트에 들러 오뚜기 자른 미역 한 봉지와 투플러스 국거리용 한우를 사 들고 왔다. 미역을 물에 불려놓고 미역국 레시피를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검색창에 미역국을 치자 ‘미역국 맛있게 끓이는 방법’이 가장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맛있게, 먹을 자격이 있나. 잠깐 망설였지만 기왕 먹을 거면 맛있는 게 좋지. 결론 내렸다. 그러나 해린의 집에는 참기름도, 국간장도 없었다. 결국 맛있게 먹긴 글렀다. 없는 대로 대충 끓여낸 국을 예쁜 그릇에다 옮겨 담고 접어놓은 테이블 러너 위에 올린 후 사진을 찍어 해린에게 전송했다. 보기엔 그럴듯했다.
그건 살인이야.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야. 수술 계획을 말하자 해린이 대뜸 내던진 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만나온 20년 지기에게 이런 야멸찬 말을 비수인 양 휘두르게 하다니 너의 하느님은 도대체 너를 어떻게 가르친 거니. 생각했지만 지옥에 떨어진대도 어쩔 수 없어. 라고만 말했다. 미역국을 떠서 한입 먹어본다. 간이 되지 않아 심심하다. 오래 불리지 않고 푹 끓이지 않아 꼬들꼬들한 미역이 식도를 타고 위장을 거쳐 자궁에까지 닿기를 바라본다. 라일락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난다. 눈물방울이 미역국 안으로 퐁당 떨어진다. 이제 간이 좀 맞겠네. 숟가락 가득 미역국을 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