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육군인데... 왜?????
1999년 4월 27일 나의 군 입대 날짜이다.
딱! 죽기 좋은 날씨구만... 영화 대사처럼 정말 딱! 훈련받기 좋은 날씨였다.
의정부에 있는 306 보충대로 입소하게 되었다.
부모님들이 계실 때는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내하고 설명해 주 던
조교들이 부모님 및 지인들이 모두 훈련소를 떠난 후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변신하기 시작했다.
"앞사람 어깨 위에 손! 앞사람 어깨 위에 손 " 이 문장과 함께 나의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3박 4일간의 보충대 생활을 마치고 육공 트럭에 몸을 의지한 채 내가 끌려간 곳은
경기도 양평, 20사단 훈련소였다.
여기서 6주간의 기본 군사 훈련을 받고 자대로 배치되는 시스템이다.
입소 후 알게 되었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2년 2개월을 지내야 될 이 부대가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때 진압하러 내려온 그 전두환 사단이었단 걸 알게 되었다.
무사히 6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 난 별도 주특기 교육 없이 자대를 배치받게 되었고
진짜 군생활의 시작되었다.
4.2인치 박격포 그것도 지상포가 아닌 차상포.
( 장갑차 안에 4.2인치 박격포를 탑재하여 운용하는 보직)
훈련소와 다르게 일과 종료 후 맘껏 시간 제약 없이 샤워를 할 수 있음에 행복하였고,
물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끼기도 전에 개념 없는 이등병 나부랭이의 지옥이 발생 된다는 걸
그땐 정말로 몰랐었다.
# 제1 연평해전 #
1999년 6월 7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 서북쪽 10㎞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 보호 미명하에 북방한계선을 3.5㎞ 침범했다. 다음날에도 북한은 경비정 4척과 어선 10척을 북방한계선 남쪽 9㎞까지 침범시켰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을 접근시켜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해 퇴각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 투입해 전적인 행동을 계속하였다. 6월 9일에는 북한 고속정이 대한민국 해군의 고속정을 충돌하여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북한 경비정의 침범이 계속되자 대한민국 해군은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선체 뒷부분을 부딪치는 “함미(艦尾) 충돌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은 계속되던 중 6월 15일 오전 8시 45분경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이에 맞대응하여 대한민국 해군도 충돌공격을 가하였다. 양측 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중 오전 9시 28분 북한 함정이 먼저 사격을 가해옴에 따라 대한민국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사격을 가하였다. 쌍방 간의 교전은 오전 9시 42분까지 14분간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당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취.)
6월 7일 오전 일과를 마치고 중식을 먹은 후로 기억이 난다.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쩌렁쩌렁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허겁지겁 군장을 싸고 케리버 50 몸체를 군장 위에 들쳐 없고 차량호로 향하였다.
준비태세 훈련은 실제 상황이 아니어도, 대대 혹은 여단 및 사단에서 훈련 대응으로 발령시키는 경우가 많아
단순 훈련으로만 생각하고 상황이 해지되길 기다렸지만, 석식을 먹을 때까지 위장 크림을 지울 수가 없었고
군장을 풀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전투화까지 벗지 못하였다...
그렇다 진짜 상황인 것이다. 실제로 바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촉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k-242 장갑차에 실 탄환을 ( 고폭탄 80발 조명탄 3발 연막탄 5발 )
적재하였고, 그것도 사단 자체 발령인 무지개 상황 (화학전)까지 걸려 방독면을 착용하고 판쵸우 까지 입은 채 그 뜨거운 태양아래서 말 그대로 머 빠지게 또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9시 뉴스에 해군의 실제 총격 대응 상황이 보도되었으며, 상황은 정말 극에 차오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점호 전 유서를 쓰라는 명령을 하달되었고, 손톱을 깎아 유서에 인식표 하나와 같이 동봉하여 관물대 서랍에
넣어 두기까지 했다.
전투화를 신고 취침을 해야 했고 기상과 동시에 사이렌이 울리고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
자대 배치받고 이제 적응도 못한 어리바리 개념 상실 이등병이었던 난 너무 힘들었고 무서웠다.
더 짜증 나는 건 싸움은 해군이 하는데 왜 육군인 내가 이런 개 같은 상황을 당해야 하는지 너무 억울했다.
식사도 전투 식량으로 보급되었고, 모든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바로 윗 선임에게 용기 내어 질문을 던졌다.
xxx 상병님. 우린 육군인데 왜 지금 이 지랄을 해야 됩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선임의 대답은 날 너무 황당하고도 허무하게 만들어 버렸다..
" 응 밤에 해군끼리 총격전 벌어지면 우리가 인천 연안부두로 가서 조명탄 싸줘야 데..
깜깜해서 안보이잖아...
하..... 내 입에선 순간 나도 모르게 시팔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었다....
이건 머.. 국회 의사당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로보트 태권V 가 출동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진돗개 상황부터 탄 적재까지 상황 발생 된 김에 실전이라 생각하고
훈련하라는 사단 지침이었으며, 인천으로 가지도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뿔.... 난 육군인데..!
참으로 전쟁이란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참전해서 겪어보진 않았지만 실전 같은 훈련 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포였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되고 월드컵 기간에 발생된 제2 연평해전을 사람들은 기억하지만, 다소 사상자 발생도
피해도 적은 제1 연평해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듯하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제1 연평해전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군인들은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여 대응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제2 연평해전에서 발생된 6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에게 깊은 조의와 감사를 표하며,
지금도 조국 수호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역 군인 60만 명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