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봉 연구원을 버리고 저연봉 PD가 된 이유

당신은 직업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가?

by 뚜뚜진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나는 이 말을 참 싫어한다.

지옥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낙원을 원하겠는가? 조금이라도 나은 지옥이 있다면 도망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식품 연구원을 다닐 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돈을 지불하고 청춘을 빼앗아 가는 지옥 같았다.


평범한 지방대학교를 나와 학과에서 2,3등을 차지해 가며 (매번 1등을 노렸지만 미끄러져 간발의 차이로 실패)

단연코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아갔더랬다.

대학교 2학년 때에는, 우연히 마주한 대기업 면접이라는 기회를 부득부득 잡아 조기취업에 성공했고,

졸업 후의 미래가 정해진 3,4학년때에는 자취를 시작하며 알바와 대외활동 수입으로 월세집의 생활비를 충족했다.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 용돈도 받지 않았다.

돌아보자면, 조금은 기대보고 조금은 응석 부려도 되었던 스무 살 초반인데

장녀라는 꼿꼿한 자존감이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었기에 (현재에도 다름없이)

그저 내가 성공한 대기업에 다니는 엄친딸로 보인다는 것에 만족했고, 또 안도했다.


그러나

정작 사회에 나와 식품업계에서 내노라하는 대기업을 다니는

갓 졸업한 24살에겐 또 다른 꿈이 있었다. 절대 실현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장래희망"이라고도 발음하지 못한. 말 그대로 "꿈" "환상" 같은 것

그게 바로 PD였다.


대학교 3학년, 4학년에는 식품기사와 위생사를 준비하면서도 시간이 남아도는 나이인지라

내 24시간 중 공부에 10시간을 쓴다면, 남은 14시간을 몰두할 다른 일이 필요했다.

매일 술을 들이부어야 하는 학생회는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고, 학과 동아리는 들어갈 필요를 못 느꼈기에

친구가 추천한 "학교 공식 홍보대사" 면접을 보게 되었다.

이때는 몰랐다. 내가 이 홍보대사에서 어떤 영향과 가치를 얻게 될지.

촬영도. 편집도. 기획도 모든 게 무지했던 22살의 나는 홍보대사에 들어가자마자 카메라를 배우게 된다.

전문 강사도, 교육 영상도 없다. 그저 한기수 위의 선배들이 전수해 주는

소위 "감으로 알게 된" "주먹구구식" 촬영 기법이었다.


그럼에도 선배들이 열정적으로 알려주는 카메라의 렌즈들이, 구도를 잡는 방법들이, 피사체를 매력적으로 촬영하는 작은 팁을 알려주는 모든 침방울들이

한 달 30만 원을 받는 열정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든 태도들이

비효율적이더라도 시간을 들여 모든 촬영구도를 연구하는 바보 같은 시간들이

내 가슴을 널뛰게 만들었다.


홍보대사를 시작한 첫 해에는 기획촬영팀에서 약 50편의 영상을 만들어냈고 (보통 인당 20편을 만든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4학년이 된 다음 해,

기획촬영팀장으로 (월급은 30만 원으로 동일했지만) 진급되었다.

이 작은 청춘의 사회가, 내가 처음 받아본 (나름) 직급이라는 것이 PD라는 꿈의 뼈대를 만들어주었다.


현실로 돌아와 2025년.

식품 대기업에서 수출 담당자 -> 판교의 연구원으로 이직한 둘째 해였다.

연구원의 분위기는 현무암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고인대로 고여있고, 곪은 것은 터지고 터져 기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만

정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곳

고연봉, 눈치 없는 육아휴직, 판교라는 위치,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회사 이름

이 이유들이 내 발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녀로의 중압감이 상당했던 나로서는 (사실 가족 중 아무도 부여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안정적인 연구원을 다니는 지방에서 상경한 성공한 딸"

이라는 스스로 세운 프레임이

꿈이라는 과녁에서 자꾸만 화살을 빗나가게 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중증의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발생했다.

정신적인 모든 병들은 -자연재해처럼- 옆의 가까운 사람도, 심지어 나조차도 모르게

내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게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생각은 내가 죽어야 할 이유로 번져갔다.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아도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왜 엄살이야?" "남들은 부러워해"

라는 말들에 감정을 내뱉지도 못하고

누군가 톡 치면 바로 터질 것 같은 복어처럼 (참고로 복어의 독은 치명적이다)

잔뜩 웅크려 있었다.


그리고 연구원을 다니던 어느 목요일, 출장을 나가던 차 안에서

갑자기 핸들을 꺾어 전봇대에 박아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퇴근 후 정신과에 뛰어갔다. (합리적인 칼퇴근에 살짝 신난 것도 있었다)

정신과에서는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의 행동이 보인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고

그렇게 나는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 누가 본인이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을 떠벌리고 싶겠는가?"

내 희망과는 달리, 바로 옆자리에 앉은 대리님이 내 약봉지를 보고 정신과에 다닌다는 것을 알아챘다.

대리님의 가족 중 한 분도 비슷한 계열의 약을 먹고 있었기에

약의 성분만 적혀있는 봉지만 보더라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경솔했다)

대리님과의 길고 긴 면담 끝에 우리가 내린 결정은

"그 무엇보다 내 행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

난 이 단순한 진리를 왜 잊고 있었을까? 장녀라는 프레임이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핑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국의 장녀, 장남들은 100% 공감할 것이다. 아님 말고.)



그래서.

연구원 연봉의 50%, 즉 반절을 삭감하고

영상업계의 한 중견기업 PD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