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경도 처음이라
"안녕하세요 PD님, 서대문 오피스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출근을 축하드립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감독님의 첫 문자이자
나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첫날부터 PD라고 불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욕심이었다.
개인 유튜브를 운용하며 작디작은 광고 수익정도는 받아본 적 있지만,
내 손으로 렌즈를 찌걱이며 REC 버튼을 누른 영상으로 월급이나 큰 금액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PD라는 호칭이 어색한 그 이유였다.
그래서 더 벅차올랐고, 더 욕심이 생겼다.
어떻게든 바득바득 성장해서 홍대뿐만 아니라 방송국, 넷플릭스
더 넓은 곳으로 도약하고야 말겠다는 불꽃이 마음속에 힘차게 일었다.
첫 출근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지금까지 거쳐온 모든 직장에서는 8시나 9시 출근,
심지어 일이 많으면 새벽 4시에 통근버스를 탔어야 하는 나날도 꽤나 많았기에
9시가 한참 넘는 출근시간에 잔뜩 놀랐더라지
"영상업계는 확실히 프리한가..? 늦잠을 잔뜩 자도 되겠어"
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며 홍대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 회사에서는 사원->주임->대리 진급이 아닌
선임->책임->팀장...으로 진급하기 때문에 첫 명함은 00선임이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불러주는 PD라는 호칭.
그 작은 영어로 이루어진 단어 하나가 뭐라고 이리 가슴이 뛰는지
페티시가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후끈거렸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3팀의 사무실 (1~3팀으로 나뉘고, 나는 3팀 PD 소속이다)
남자 책임님 한 분이 맞아주었다.
알고 보니 다른 PD 님들은 촬영을 나갔거나, 로케이션 사전답사를 하기 위해 출장을 나가신 상태였다.
아,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곳이 내가 원하던 꿈의 장소였지
꿈에서나 상상했던 -청춘들이 뛰어다니는 스타트업의 분위기- 를 실제로 마주한 것이다.
마치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번외의 환상 편을 겪는 것 같았다.
내 나이 스물여섯.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지만 괜스레 걱정된 건 사실이다.
무엇을 걱정했을까?
직장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아니다. 나는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도 금세 적응하고야 만다.
로망과 다를까 봐? 이것도 아니다. 로망과 달라도 업계를 바꾼 이상 해볼 수 있을 만큼 해봤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바보같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는...
이제 생각하면 참 우습고도 귀여운 걱정이었지만, 당시에는 꽤나 진지했더라지
종종 SNS에 나오는 "눈치 없는데 나이는 많은 막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상을 좋아하고 카메라를 일찍이 만져보았지만,
영상을 업으로 삼은건 정식으로 처음이기에 배울 것도 부족한 점도 넘치게 많을 것이라는 걸 일찍이 예상하고 있었다 (현실도 그랬다.)
다행히도(?) 내가 제일 막내였고, 그다음이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안도의 한숨을 뱉어냈다.
막내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꽤나 많다.
1. 질문을 많이 해도 그러려니 한다.
2. 막내가 실수하면 누군가가 커버를 쳐줄 수 있다. (악용하면 안 되지만)
3.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에게 업무 경험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조언도 끊임없이 배울 수 있다.
4. 나이가 들어서 되고 싶은 미래의 내 모습을 선배들에게 찾기도 쉽다.
5. 막내가 커피를 사 오면 좋아한다. (나는 커피를 돌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점심시간이 되기 10분 전, 출장을 나간 모두가 돌아왔고
회사 바로 앞 중식집에서 중식을 나눠먹으며 팀원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놀랍게도 모두가 영상 관련 학과를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상업계라는 건 "열정"과 "배우려는 끈기" 그리고 "엄청난 체력"이 상향평준화 되어있구나
새삼 깨닫게 한다.
차라리 관련 학과나 스킬이 명확히 필요하다면, 집중과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는 PD부터 유튜브 PD, 방송국 PD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나뉘는 업계인 만큼
자격증이나 학과보단 자신의 경험과 열정이 다른 직무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시라도 어리고 체력이 남아있을 때
영상업계로 업계전향을 한 나 자신에게 칭찬의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사실 글쓴이는 25년 5월에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았으므로 그날부터 PD를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몸집을 키우다 퇴사를 결정한 이유도 있다**
P.S 신기했던 점
우리 회사는 점심시간이 1시간 반이라는 것
30분은 밥을 먹고 남은 1시간 동안 자리에서 자거나, 회의실에서 다 같이 모여 카드게임을 한다.
확실히 스타트업은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걸 매 점심시간마다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