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가을밤에 떠오른 엄마의 마음 - 고양이 소설
“마치 약속한 것처럼 만나는 가을밤의 기억들이겠지.”
가을밤이면 아이들은 하나둘씩 거리로 모여든다. 오래 살아남은 아이든, 아직 세상에 서툰 아깽이든, 저마다 정해둔 자리에 앉아 묘생을 되돌아본다. 별빛이 고요히 흘러내리는 그 시간에는 바람이 지난 계절의 냄새를 실어 나르고, 오래된 기억들은 그 바람에 따라 되살아난다.
엄마냥이도 그런 고양이였다. 누군가의 엄마로 살기 전, 자신도 누군가의 딸이었다. 왕엄마 고양이의 품속에서 눈을 뜬 그날 이후로, 그녀의 묘생은 결코 쉽지 않았다.
왕엄마는 딸이 태어나던 순간,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길 위의 삶이란 매 순간 배고픔과 추위, 사람의 변덕, 그리고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 살아남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닫아야 했고, 무엇보다 이겨내야 했다. 왕엄마는 갓 태어난 엄마냥이에게 거듭 다짐처럼 말했다.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마. 먹을 게 있으면 절대 양보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해. 꼭 살아남아야 해.”
그러나 그 가르침이 딸의 가슴에 남긴 건 따뜻함이 아니라, 결핍이었다. 함께하는 존재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에는 먹을 것이 늘 부족한 탓에 엄마냥이는 크지 못했다. 뚱냥이가 될 기회조차 없던 작은 몸집은 유전이 아니라, 가난한 묘생의 흔적이었다.
왕엄마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엄마냥이는 홀로 고단한 삶을 버텨야 했다. 세상은 혹독했고, 그녀는 그 안에서 몸으로 배우며 성장했다. 하지만 정작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건, 그녀 스스로 엄마가 되고 나서였다.
어릴 적 미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하루 종일 어딘가로 떠나 홀로 굶주리며 남겨졌을 때, '엄마는 날 버린 거야'라고 믿었던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엄마가 떠난 뒤에야 알았다. 그것이 버림이 아니라, 사실 그녀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어쨌든 엄마는 늦더라도 결국에는 돌아왔고, 부족했지만 밥을 물고 돌아왔으니까.
“엄마... 미안해. 고마워.”
그 말을 야옹야옹 전해줄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더 늦게, 엄마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엄마냥이는 그 슬픔에 목이 메여 목소리를 낼 줄 모르는 고양이가 되었고,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만 속마음을 대신했다.
그녀는 세 아이를 낳았다. 하나는 츄르 맛도 모른 채 별이 되었고, 남은 두 마리 중 삼색이와는 짧은 묘연을 함께하다 보냈다. 남은 한 마리, 억울이와는 여전히 함께 사는 엄마냥이는 단 한 순간도 아이들에게 결핍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늘 양보했다. 사람들이 주는 밥은 먼저 삼색이와 억울이에게 건네고, 자신은 그들이 남긴 부스러기를 입에 넣는 습관이 생겼었다.
그리고 언젠가, 마음속으로 왕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난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만 살진 않아. 사람을 무조건 피하지도 않았어.
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아플 때 챙겨주고, 배고플 때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더라.
그리고 양보하지 말라던 말도 지키지 않았어.
내 새끼들이 먹는 걸 보는 게 내 묘생의 가장 큰 기쁨이거든.
사는 이유가 따로 있겠어? 그게 다지.”
“근데 말이야, 엄마. 이제야 알겠어. 엄마야말로 스스로 한 말을 지키지 못했잖아.
사람을 믿지 말라 하면서, 결국 날 먹이려고 경찰들 앞에서 울며 도움을 청했잖아.
양보하지 말라 하면서, 겨울엔 가장 따뜻한 자리,
여름엔 가장 시원한 그늘을 내게 내어줬잖아.
나는 덕분에 살았고, 사랑을 알았어.
그리고 그 사랑을 내 새끼들에게 줄 수 있었어.”
엄마냥이는 깨달았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특별한 비밀도 아니었다.
행복은, 지킬 수 있는 이를 위해 내어주는 마음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이어지는 한, 엄마와 함께했던 수많은 가을밤처럼 다시, 다시 엄마를 기억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가을밤의 바람은 언제나 조금 차갑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서 아이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어쩌면 그 차가움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엄마냥이는 이제 예전만큼 힘차게 지붕을 뛰어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아직 억울이가 있다. 한때 작디작던 아이가 어느새 몸집이 커져, 이제는 엄마를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 억울이는 늘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했다.
“엄마, 내가 간식 들고 있는 사람 찾아 데려올게. 이제 엄마는 앉아있기만 하면 돼.”
그 말 속엔 어린 시절 굶주림과 외로움으로 엄마가 자신을 지켜주었던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엄마냥이가 억울이에게 건넨 사랑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마리, 루나가 있었다. 검은 털빛에 눈빛만큼은 유난히 맑은 아이. 한때 루루와 함께 다니다 홀로 남게 된 아이였지만, 엄마냥이는 그 외로운 등을 그냥 두지 않았다. 마치 잃어버린 딸 삼색이를 떠올리듯 루나를 품었다.
루나는 처음엔 경계했지만, 이내 엄마냥이 곁에서 머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결국,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기댈 곳이 되었다.
가을의 끝자락, 바람이 차갑게 불던 어느 날. 엄마냥이는 오래된 기억 속 왕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잘 살아야 해. 꼭 살아야 해.”
하지만 이제 엄마냥이는 안다. 살아낸다는 건 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그 마음을 이어받으며 서로의 생을 지켜내는 것임을.
별빛이 고요히 쏟아지는 그 가을밤.
세상은 여전히 험난했지만, 그 밤만큼은 고양이들에게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평화 속에서, 사랑은 또 한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