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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루하루 잘 산만큼 잘 죽어가는 인생에 대하여

by 유쾌한T맘

유시민 작가는 일면식도 없지만 삶의 행보가 언제나 진보적인 견지를 고수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진언을 했기 때문에 내적 친밀감이 상당히 높다. 지난 대선 직전에 설난영에 대한 직언으로 파문을 겪어 꽤 크게 마음 고생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틀린 말 하나도 없었고 곡해의 여지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극우들은 그들답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결국 대선 결과에 행여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며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조용히 낚시터로 발길을 돌렸다. 한 때 정치의 길을 걸은 적도 있지만 난 그냥 그를 작가로서 보고 싶다. 그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올곧고 화가 많으며 능수능란하지 못하다. 유시민 작가의 팬들은 그의 그런 면모 때문에 그를 더욱 아낀다. 아마도 작가의 팬들은 아사리판인 세상을 그러려니 하며 무심히 대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성미가 작가와 닮았으리라. 자신과 닮았지만 압도적으로 지성적인 그의 말을 듣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았으리라.



그는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하고 안 통하던 이야기가 술술 잘 통하는 작은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낚시 채널을 보진 않기에 그의 은둔적인 요즘이 '이번 명절에는 작은 아버지는 못 오셨다'는 소식처럼 아쉽지만 그가 늘 아사리판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즐겁게 살기를 원했던 것을 알기에 응원하는 마음이다. 그는 작가이기 전에 멀리 있어도 가까운 느낌인, 언제 보아도 반가운 미소부터 확 번진 채 맞이하게 되는, 친해지고 싶은, 보기 드문 60대이다. 이 책은 20대 때 읽었으나 기억이 가물하여 팬심으로 다시 읽었는데 이제 마흔을 넘긴 결코 어리지 않은 나이여서 인지 더 와닿고 깨닫는 바가 많았다. 늘 학문과 식견을 담은 내용을 많은데도 쉽게 이해하게끔 쓰는 큰 장점을 가진 작가다. 그의 책을 몇 개 읽고 나면 인문학을 꽤 뚫고 나간 착각마저 들 정도다. 이 책은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석하며 은연중에 인생에 대한 조언을 던져주는데 다 읽고 나면 그동안은 어찌 살았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벅참이 느껴질 것이다.



(책은 오래전 반납했고 발췌 부분을 페이지가 안 나오게 캡처해서 페이지 명시가 없음을 양해해 주시길)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혀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어느 쇼츠 영상에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너무나 현실적인 사랑 고백을 외친다.

"내 사이즈에 맞는 사람 중에서 내가 너를 제일 사랑해!"

자기도 자기 자신을 잘 안다며, 다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고 사는 거라며. 너무 솔직한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던 여자친구는 갑자기 '오빠 사랑해'라고 말하며 해피엔딩.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현실에 타협한 삶을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은 J인데 결혼은 Y와 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은 A이지만 잘하거나 그걸로는 돈 벌고 살 자신이 없어서 B를 하고 살아간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까지 잘 벌고 있다면 그야말로 A급 인생이다. 오해하지 말자. 여기서 말하는 급수는 인생의 수준이 아닌 만족도 차원의 이야기다. 물론 인생에는 자기가 하는 일 외에도 일단 건강문제부터 가족, 친구 등과 나누는 사랑과 우정 등 여러 인간관계, 개인적인 다양한 경험들이 한데 어우러지기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잘 벌고 있냐만을 두고 괜찮은 삶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건강, 인간관계, 개인적 경험, 환경 등을 배제하거나 비슷하다고 가정하고 본다면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다 한 결이면 행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아예 초월한 채로 매 순간마다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은 S급이다. 가진 건 없지만 나는 여러 풍파로 S급 인생을 살게 되었다. 크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쭉 살고 싶다. 만들고 있는 플랫폼의 출시, 소설이나 에세이 출간 작가의 꿈, 어떻게 자랄지 아직 무궁무진한 초등학생 딸을 위한 나의 역할 등 염려와 기대를 안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들은 있지만 그건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 별로 타인의 삶에 큰 관심이 없어서 주변인들이나 외부적 요인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제아무리 부러울만한 누군가의 삶을 보아도 부러움보다는 금세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나은 걸 찾아내고야 마는 자존감을 가졌다. 누군가를 존경은 할지언정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모든 게 금방 휘발되어 찌꺼기가 남지 않는 클린 한 나의 정신상태는 가히 훌륭하고 돈주고도 얻지 못할 자산이라고 자부한다.



한 때 열심히 살자는 것 이상으로, 객관적으로 뭔가를 이루고 성공하지 못한 삶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식으로 대중을 몰아갔던 스타 강사들이 판을 쳤다. (물론 지금도 그런 식의 강의는 널려 있다.) 그런 강사들 중에 정작 자기는 스타 강사로서 기본적 자질조차 거짓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대중 앞에 서는 화려한 삶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된 이들도 있다. 뭔가를 이루고 성공한 것은 마땅히 박수받을 일이지만 앞서 말했듯 인생을 일구는 요소에는 일에 대한 성취 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들은 따로 있다. 성공만을 강조하는 강사들이 말하는 바람직한 삶은 기본값과 옵션이 거꾸로 설정된 삶이다. 설정값이 잘못된 삶을 좇다 보면 그 말로는 좋을 수 없다. 막말로 강사는 강사일 뿐, 남이 이렇다더라 하는 말은 적당히 참고만 하면 될 일이다. 남의 말보다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지금 그대로를 유지해도 좋은 것과 바꿔야 하는 것들을 잘 골라내고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어느 한 방향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조언보다는 여러 가지 방향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삶을 유연하게 컨트롤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에 더 귀 기울이는 편이 현명하다.




나는 반정부 시위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우리가 시위를 해도 신문에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관련 보도라고는 어느 대학 학생 김 아무개 등이 구속되었거나 징역 몇 년을 받았다는 단신 보도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언론은 이미 정부의 탄압에 굴복했거나 자발적으로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부패와 인권유린을 아무리 비판해도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어떻게 바꾼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 자신을 지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독재자 밑에서 공무원을 하거나 독재자를 찬양하면서 돈을 가져다 바치고 그 대가로 특권을 받는 재벌의 일꾼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좋지 않은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은 확실하게 지키고 싶었다.




유시민의 또 다른 저서 <청춘의 독서>에서 자세하게 언급되는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극우적 황색언론이 한 사람을 어느 지경으로 몰고 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마이클 잭슨도 살아생전 소아성애자 취급을 당하는 등 황색 언론의 피해자였다. 황색언론의 피해 사례를 일일이 언급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한 지경이라 말할 수도 없다. 예전에 친구가 주요 언론사의 편파적 보도를 일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지적하자 친구가 했던 말이 있다.

"그게 편파적인지 아닌지 너는 어떻게 아는데.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다 알아. 살기도 바쁜데."

일단 나는 오래전 칼럼 기고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기자 일을 잠시 했던 친구나 지인을 통해서 우리가 쉽게 접하는 주요 언론 보도들이 왜 기득권 쪽으로 기울어 편파적으로 보도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알게 된 바가 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연재한 대선 전후의 글에서 서술한 바가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문제는 설령 그런 언론사와 기득권의 뿌리 깊은 유착에 대해 안 다하더라도 자꾸만 사람들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까'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주요 언론사는 대중들의 그런 안일함과 나태함 덕분에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나는 보통 주요 언론사 외에 진보. 개혁적인 성향이 강한, 한마디로 힘이 별로 없는 언론사의 보도까지 다 아울러 최소 10개 언론사 이상의 보도를 본다. 그리고 그 모든 보도 내용을 내가 갖고 있는 상식과 논리에서 아귀를 맞춰본다. 그렇게 아귀를 맞춰 보려면 독서나 탐색 등을 통해 자기 안의 상식과 논리를 쌓는 행위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보는 안 볼 거면 안 보고 볼 거면 확실하게 봐야 한다. 살기 바쁜 거? 인정. 그렇다면 한 두 개의 보도만을 보고 믿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고 아예 세상을 모르고 살라고 말하고싶다.



유시민 작가가 대학생 시절의 언론사는 그냥 글 깨나 쓰는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해산날을 앞두고 있는 지금의 검찰이 법 깨나 아는 조폭인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위한 항변을 하다 스러져가는 청춘들에 대한 보도는 너무 많은 진실이 가려져 있어 국민들에게는 말 참 오지게 안 듣는 젊은것들에 대한 보도로서 피곤함만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춘들이 기꺼이 정의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 중 고문 끝에 동료를 발설했거나 허위 자백을 한 이들이 있다. 고문을 이겨내지 못한 것,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은 비정의가 아니다. 정의와 비정의는 목숨은커녕 일상에서 작은 손해하나 감수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함부로 떠들 개념이 아니다. 온갖 걸 다 겪은 마당에도 민주화, 인권과 자유에 대한 견지를 변치 않고 고수한 것이 정의다. 한 때 다른 블로그에 쓴 글에 누군가 유시민 작가가 과거 민주화 운동 당시 취조 끝에 동료를 발설한 건 알고 떠드냐고 댓글 단 적이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강압에 의해 허위자백을 한 터라 소속원이었던 유시민도 허위자백을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세상을 느끼는 감각과 지향하는 세상은 한결같기에 그는 정의로운 축에 있다. 그러는 당신은 그 때 사회나 정의를 위해 뭘 했는지?



너무 피폐해져서 견지를 놓아버리고 은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 극우의 일원이 되어 다른 이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삶을 사는 것은 비정의다. 지난 대선에 김문수가 후보로서 자신의 홍보물에 '정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노동 운동이 저의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실을 바꾸는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라고 써놓으며 자신의 비정의를 새로운 길이라고 포장한 것이 너무 조악하여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독재자를 꿈꿨던 윤석열 김건희를 찬양하면서 돈을 갖다 바치거나 그 대가로 돈을 받은 극우 정치인 및 관계자들, 그들에 대해 왜곡된 정보만 받아들이며 세뇌당한 극우 세력 추종자들, 극우 기독교 교회와 손잡은 정치인들과 그런 교회에 소속되어 극우 목사가 하는 말에 세뇌당하는 답 없는 사람들, 살아남기 위해 돈 대주는 집단이 선호하는 기사를 쓰는 언론사, 대대손손 친일의 행보를 보여주고 상위 몇 프로만 국민으로 생각하고 소외된 탓에 의지할 데가 별로 없는 이들을 이용하는 극우 정치인들... 다들 인간으로의 자존은 지키고 사는지?



모르긴 몰라도 끊임없이 스스로 세뇌하는 작업을 멈출 수가 없고 그 뻔뻔함을 멈출 수가 없기에 매우 피곤할 것이다. 바득바득 우겨야만 하는 통에 턱도 아프고 악에 받쳐 있을 것이다. 마치 그들은 저주 걸린 분홍신을 신고 계속 춤을 춰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SNS에서 단순한 일상 또는 특정 주제를 다룬 글에 가끔 맥락과 취지를 이해 못한 채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댓글을 볼 때가 있다. 다짜고짜 '너는 ~', 으로 시작해서 '~했냐'로 비난 조거나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밑도 끝도 없이 상처 주는 말을 남기기를 즐긴다. 왜 그렇게 또 '어미 뒤진' 시리즈는 즐기는 건지. 도대체 무슨 인간인가 하고 그 사람 피드를 가보면 백이면 구십오 비율로 프로필에 윤어게인이나 멸공, 변질된 그놈의 '자유 민주주의'를 써놨거나 이재명 대통령 사진을 흉하게 훼손한 게 올라와있다. 난 이제 그들이 왜 그러는 걸까 궁금하지 않다. 그저 어떤 연유로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느라 악에 받친 흉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자존감을 가진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내 생각이 자란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실존주의가 아예 접근할 수 없는 철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히 맛나지는 않아도 건강해지려면 조금은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잘 사는(well-being)데 관심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살아도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형 집행일과 집행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잘 죽는(well-dying) 문제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라고 권한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하겠기에, 실존주의는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내가 실존주의에 접근하는 실용주의적 방법이다.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나의 죽음이나 장례식 같은 걸 상상하지 않았다. 비로소 이제 평안에 이른 것이다. 10대 후반에는 아빠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자주 상상했었다. 20대 후반에는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죽음이 상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그때는 엄마가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친정 식구들과도 멀어졌다가 바로 윗 언니네와 느지막이 왕래하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때였다. 나름대로 콧대가 있던 젊은 시절이 있던 터라 오래된 친구는 엄마의 자존심상 더욱 멀어졌다. 나와 둘이 살기 시작하고부터는 말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는 것이 싫다며 남편이 있는 척을 일부러 한 건 아니어도 딸이랑 둘이 살고 있다고 말한 적도 없이 대충 둘러대고 살아온 터라 정을 나눈 동료도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하나뿐인 딸이 죽었다 한들 누가 달려올까. 11년 전 나의 결혼식 때 청첩장을 드리니 셋째 이모는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아니 왜 줘? 둘이 손 꼭 잡고 오붓하게 하면 될걸."

우리 엄마 빼고는 이모들은 다들 유머 감각이 좋아서 난 늦게나마 이모들을 아빠 대신 의지하며 조금은 든든한 마음으로 결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야 당연히 증오했지만 엄마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엄마도 자식으로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또한 인정하는 바) 뼛속깊이 이제 다 울었으면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주의인 나에게 계속 울고 있고 언제나 한숨을 쉬고 있는 엄마는 답답했다. 엄마는 어쨌든 끝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며 나를 책임졌지만 나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내가 바란 강한 엄마는 아니었다. 어쨌든 엄마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과 답답한 심정이 한데 뒤섞여 엄마를 안아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나 싶었다. 유년 시절 내내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고 사는 걸 터득해서 외로움이고 사랑이고 간에 깊은 감정 같은 건 잘 느끼지 않았기에 위로받고 싶은 마음조차 금세 날아갔다.



부모가 잘 만들어주지 못한 아이들은 어느 정도 알아서 크는 것도 사실인 모양인지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지 하면서 스스로 자체 조립했다. 조립은 나름대로 잘 되어서 나는 인간이 맞나 싶은 아빠와도 다르고 철저하게 외롭고 슬프기만 한 엄마와도 다른 성격이다. 그래서 나에겐 친구가 조금은 있었다. 친구가 많은 것까지는 원치도 않았고 어차피 힘들었다. 삶이 고단하기도 했고 어떤 일에도 전혀 타격감이 제로인 나를 독특하게 여기고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많은 이들이 답답하거나 탐탁지 않은 탓에 굳이 다가가지 않은 경우도 혼재되어 있었다. 아마 그 젊은 나이에 내가 죽었더라면 그나마 식장을 조촐하게나마 채워줄 이들은 내 지인들 몇 명뿐이었을 것이다. 인간관계를 확장하는 편은 아니라 지금이나 지인의 반경에 큰 차이가 없지만 인생의 나이테가 적은 탓에 지금보다 조금 더 적은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그때 식장에 온 사람들은 죽기에는 다소 젊은 내 영정사진을 보면서, 그냥 밥을 먹다 말고 나를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들을 나눴을까. 과거는 비참했고 그 무엇도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못한 삶이었기에 안타까웠으리라.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마다 더 잘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삶을 마감한 순간이 비참하고 초라하지 않으려고 매일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배우자 간,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외롭지 않게 지켜주고 싶은 의미도 있다. 수년 전 외할머니의 장례식에도 외할머니가 특별한 스펙이 없었음에도 98세 동안 자녀 7명을 두고 그 자녀의 자녀들,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친구 및 지인들까지 다들 모이니 외할머니가 가시는 길은 전혀 외롭진 않아 보였다.



누구나 자기가 죽었을 때 제법 회자할 거리가 있는 삶, 욕보다는 칭찬이나 추억이 많은 삶, 자신이 죽고 난 후 남은 가족들이 자신이 죽었다는 슬픔 외에는 불행할 다른 요소를 남기지 않는 삶을 꿈꾼다. 결국 살아있는 자가 잘 살고자 하는 욕심은 망자의 욕심과 맞닿아 있다. 가족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기 영역에서 열심히 사는 건 이토록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미 나 하나만 보아도 아빠가 인간쓰레기였던 관계로 결혼식도 물론이고 장례식에서도 반토막은 난 채로 시작해야 하지 않은가. 장례식은 결혼식과 달리 허례허식이랄 것도 딱히 없다. 엄중할 정도로 거두절미하고 오로지 '아무개가 죽었다.'라는 사실만 던져준다. 결혼식은 축하도 축하지만 솔직히 볼 것도 먹을 것도 즐길 것도 많아 절로 간다지만 장례식은 가봐야 정반대인 상황에서도 갈지 말지가 정해지는 것이다. 나의 죽음에 또는 나의 가족의 죽음에 기꺼이 와서 밥 한 끼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고 위로를 나눌 이들이 오늘 보다는 내일 더 많기를, 그런 인연들이라고 믿어온 이들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구로동 야학교사 시절을 생각하면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저녁 무렵 구로공단 진입로와 이화여대 앞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격할 수 있었던 강렬한 콘트라스트(contrast)다.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가 된 구로공단 진입로에는 고된 하루 일을 끝낸 여성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퇴근하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도 웃는 사람도 드문 침묵의 행렬이었다. 그 시각 이화여대 앞 골목은 강의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여학생들로 붐볐다. 그들은 봄날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웃고 떠들며 걸어갔다. 양쪽 모두 스무 살 갓 넘은, 동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나는 둘 모두를 보았다. 모든 면에서 그들은 달랐다. 옷차림, 피부, 표정, 걸음걸이까지. 마치 인종이 다른 것 같았다.


나는 한 달에 26시간 일하고 6만 원을 버는데, 나와 나이가 같은 야학 학생들은 250시간 넘게 일하고도 2만 3천 원을 받고 있었다. 시간급으로는 백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노동을 제한하고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한 헌법과 노동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로공단 앞'과 '이대 앞', '26시간 6만 원'과 '250시간 2만 3천 원', '시급 2천 원과 시급 백 원'의 콘트라스트가 괴로웠다. 가해자가 된 것만 같았다. 비록 본의는 아닐지라도, 타파해야 할 불평등과 사회악에 기대어 쉽게 사는 기득권층이 된 기분이었다.




1970년대는 어찌 운이 좋아 여자로서 대학교를 나온다 한들 그건 그저 좋은 집안에 시집 잘 가기 위한 하나의 구색에 지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 잘난 스펙을 어디에 활용이라고 할라치면 여자가 드세다 하며 어떻게든 찍어 누르기 바빴다. 하물며 대학까지 나온 있는 집 여성들도 이런 지경인데 변변치 못한 배경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란 얼마나 혹독했을까. 그들을 착취하는 사용자와 그들 편에 선 소수의 남성 간부들은 무법자처럼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못 자고 못 먹어가며 일해서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돈은 모이지 않았고 성적 유린도 비일비재했다. 여기가 아닌 저기를 가도 상황은 다 마찬가지였다.



특히 1300명의 직원 중 1200명이 여성인 공장에서 사장도 아닌, 고작 여성 지부장 한 명이 후보로 올라오자 그걸 죽어라 하고 막느라 경찰까지 한 통속이었던 1978년 동일방직 사건은 정말 끔찍하고 추악하다. 투표를 막기 위해 똥물을 퍼와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부었고 도와달라는 노동자들의 말에 오히려 경찰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노동자들이 한계에 다다르자 옷을 다 벗고 대항하는 데도 경찰들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은 리스트가 돌고 돌며 어디에서도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폭력의 상흔은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저 법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받겠다는 당연한 목소리를 그렇게까지 짓밟을 일이었을까. 경찰이 나서서 노동 운동자는 빨갱이라고 말하던, 창피하게도 그런 시대가 정말 있었다. 경찰들은 박정희의 개들이었고 개들을 호령해 봐야 본인도 그저 한낱 개일뿐, 결국 총을 맞고 나서야 그 지옥의 시대는 비로소 끝이 났다. 그 시대가 그렀을진대, 아직도 멸공 소리나 하고 자빠진 우매한 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노동 운동은 탄압에도 그칠 줄 몰랐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여러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초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야학 수업을 하던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더해져 지금의 근로기준법과 노동 3권, 최저임금제 등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법도 있으나 있는 법도 없던 시대여서 있는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오랜 세월과 희생이 필요했다. 배운 게 많은 이들이 그만큼 대접받고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사회는 다들 어떻게든 더 배우려고 하면서 발전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식으로 만든 체계는 결국 노동자들이 일을 해야 실현 가능하다. 그 어떤 멋진 청사진도 노동자들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안타깝게도 업주와 노동자가 상생하는 사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최근에 런던베이글뮤지엄 인천 지점 직원이 26살의 나이에 주 80시간에 달하는 과로로 사망했다. 이에 런던베이글뮤지엄 측은 처음에 근로시간 입증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근무시간은 출퇴근 기계의 오류라고 말하며 산재를 신청한 유족에게 부도덕하다는 망언과 직원들 입단속까지 했다. 하도 여론이 빗발치자 뒤늦게 수습중이지만 이미 산재 승인만 29건에 달하고 직원이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컵을 꺼낼 때 허리선이 보이도록 일부러 불편하게 동선을 짰다고 말하던 괴랄맞은 직무 교육을 하고 사소한 실수에도 시말서를 쓰게 했으며 직원들에게 '야, 너'는 기본에 '노란머리'등 개인적 특징으로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터질 일이 터질 걸 지들도 알아서 갑자기 매각해 2000억을 벌어들인 것 같다. 그 뻔뻔함과 부도덕함에 런던베이글뮤지엄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먹을 일 없어졌다.



유승민 전 의원의 장녀 유담이 31살의 나이에 고작 박사학위 취득 후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강사 경력이 전부인데도 인천대학교 정경학부의 조교수 자리를 차지한 것과 이렇게 안타깝게 착취당하다 사망한 26세의 故정효원씨의 사례에서 우리는 극명한 대조점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 불편함으로부터 연대가 시작된다. 인천대학교 측은 강의 경력보다 연구실적에 따른 경력점수를 더 높게 평가했다고 했으나 23명의 지원자 중에 유담을 포함한 현 타 대학 조교수 재직 중인 자 등을 포함하여 단 3명만 경력점수에서 만점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객관적으로 가장 별 볼 일 없는 경력자인 유담이 임용된 것은 '아빠가 유승민이라서' 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론은 아직도 기득권의 개들이라 조민 때처럼 난리치지 않았다.



그러면 또, 명백한 노동 착취를 당한 채 죽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장사 잘만 되더라 하며 또 악독한 업주의 해피엔딩이 되어야 하는가? 롯데월드 사망 사건 이후의 무료 개방에 벌떼같이 모여들었던 사람들, SPC 사건 이후에도 파리바게트 빵을 먹는 사람들, 이번 사태 이후에도 런던베이글뮤지엄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또 그런 비극적 엔딩이 될 것만 같다. 악독한 업주만큼이나 연대 의식이 결여된 국민 또한 이 사회의 병든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치명적 요소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업주는 '어차피 그래도 세상은 우리편'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산재를 적극적으로 유발했고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업장은 폐업처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일부 사람들은 진보적인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일을 하지만, 진보주의 그 자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임이 확실하다. 크게든 작게든, 급격하든 점진적이든 생활환경은 늘 변화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필요하다. 모두가 예전의 상황에 맞는 익숙한 생각과 행동만 한다면 개체뿐만 아니라 집단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은 인간의 일반 지능을 진화시켰다. 이것이 일반 지능의 발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다.


만약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럽고 진화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일반 지능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사바나-IQ 상호작용 가설'이라는 것이 둘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이 가설에 따르면 지능이 낮은 개인은 지능이 높은 개인보다 조상들의 환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진화적으로 새로운 존재와 상황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연애, 출산, 육아, 길 찾기처럼 진화적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을 하는 능력에는 일반 지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증적 연구가 '사바나-IQ 상호작용 가설'을 뒷받침한다. 나이, 인종, 교육 수준, 소득 수준, 종교 등의 영향을 배제할 경우 IQ가 높은 청소년일수록 진보 성향이 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의 정치적 진보성과 청소년기의 IQ는 단조증가 관계를 나타냈다. 강한 진보적 정체성을 가진 미국 시민은 강한 보수적 정체성을 가진 시민보다 평균적으로 11점 이상 청소년기의 IQ가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지능의 영향력은 성이나 인종보다 두 배가 강력하다. *가나자와 사토시 <지능의 사생활>


지능이 높은 사람은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먹이를 확보하기 위한 생존 경쟁과 후손을 퍼뜨리기 위한 성 선택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지식정보화혁명은 이런 흐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지식이 물질적 부와 사회적 권력의 원천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는 일반 지능이 높은 경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체로 소수파이며 현실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승리해도 그 승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 역사를 보면 진보주의는 패배를 거듭한 끝에 가끔씩만 승리한다. 수없이 많은 저항과 반란이 참혹한 패배를 당한 끝에 겨우 하나의 혁명이 성공한다. 그 혁명 다음에는 흔히 보수의 반동이 찾아든다. 그러면서도 사회와 문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진보적 사상이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 널리 퍼지고 일상의 행위 양식에 녹아들어 간다. 그에 따라 문명은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정의로워진다.




보수냐 진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냐 못하냐가 중요한 거다. 극우파만 남은 보수는 이제 못하는 걸 넘어 정상이 아니다. 기득권이 누리는 이 사회를, 이 보수적인 상태를 변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괜히 과거 이야기를 하며 일본을 자극하기 싫어한다. 대대손손 친일 행적을 하면서 기득권이 되었거나 그런 기득권에게 빌붙어 살며 콩고물을 핥아먹고 사느라 다 한 통속으로 일제강점기에 널리 퍼진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따르기 때문이다. 타국과의 관계에서도 자주적인 면모가 아닌 세계 정세의 현 흐름에 맞춘 의존적인 태도가 안전하다고 여긴다. 그게 다 나라를 위한 거라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라의 발전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 유지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그렇게 기득권은 누리고 비기득권은 눌리며 쭉 살다 보면 결국 사회는 부패하여 망하게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모든 역사 기록이 다 그러했음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며 거짓말을 한다. 계엄을 옹호해 놓고 계엄을 막으려 했다며 뻔뻔하게 나오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극우파들이 진보적인 이들을 혐오하다 못해 죽이려는 시도까지 하는 이유는 두려움이다. 그들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극우파들이 우매한 대중들과 너무 소외된 탓에 오히려 극우파들을 추종하는 이들을 쥐락펴락하려고 하는 것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는다. 지능과 집중력은 서로 다른 인지 능력이지만 중간 이상의 상관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진보적 인물들은 지능뿐 아니라 집중력도 좋아서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의 변화에만 몰두하는 집요함이 있다. 그런 변화에는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는 결단력이 필수적이라 그들은 행여 뭔가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오죽하면 그들에게 뺏을 거라곤 목숨뿐이라 피습까지 하고 죽음까지 몰아가겠는가. 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도 이명박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언제나 일반 지능 및 사회적 지능 모든 부분에서 월등한 진보적 인물들이(발췌 부분 참고) 결국은 백번 시도 끝에 성공하는 몇 번의 혁명으로 사회는 변화했고 진화했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극우 정당 의원들이 보다 학벌이 뛰어난 편이라 해도 어차피 그들은 종합적 지능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대대손손 가진 게 많아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섬섬옥수로 겨우 공부만 할 줄 알고 사회의 대조점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악독한 태도를 세습한 이들과 기득권이 될 수 있음에도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줄 알고 비기득권임에도 환경과 여건을 모두 타파하고 뛰어난 스펙을 갖게 된 이들 중 사람들은 후자에 열광한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절대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다 짜진 판에 등장한 인물이 아닌 스스로 판을 짠 사람에게 열광한다. 진보적 인물들은 그 열광을 추진력 삼아 힘없는 이들이 포기하려고 했던 연대를 하도록 이끈다. 연대가 커지고 보다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과정은 전혀 쉽지 않지만 연대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망하기 때문에 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치적인 개념을 떠나 개인의 삶에서도 서로 연대하여야 서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9월 말까지 공모전에 내려고 했던 소설을 여전히 쓰고 있다. SNS상에서 간간히 소통했던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의 저자 이석재 작가님은 한 때 내가 기한 내 마감 가능성을 고민할 때 너무 착하신 분이라 사람마다 속도나 역량이 다르니 충분히 하실지도 모른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지만 난 결국 해내지 못했다. 내심 그럴 줄 알았기에 반성이나 자책도 크게 하지 않는다. 작가도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천재형, 꾸준한 노력형, 타고난 분위기형 등. 나는 뭔가 된다 하더라도 보급형 작가이지 않을까. 그마저도 감지덕지일 텐데 애초에 4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탈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허황된 꿈이었다고 본다. 초반에는 금세 훅 써 내려가서 후반부로 돌입했으나 그때부터 갑자기 야구선수들의 입스처럼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는 현상에 시달렸다. 다시 글을 이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졸작의 빠른 완성보다는 차라리 완성도 있게 가다듬어서 내년 장편소설 공모나 내년도 초기창업패키지에 도전하려고 만들고 있는 자체 플랫폼에 한 회씩 분화하여 정기연재 웹드라마처럼 오픈해볼까 한다. 곧 차원이 남다른 창작자 중심 플랫폼이 출시될 예정이니 때가 되면 많관부.



소설이란 걸 처음 써보니 일단 소설책 400페이지 이상의 긴 이야기를 쓴다는 거 자체만으로 어렵다.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짜고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으면서 흥미 있게 전개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현실 고증이 기본이라 정보 탐색은 물론 이야기 속 사건이나 소재와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공도 필요했다. 직접 써보기 전까지는 누군가가 소설 같은 걸 왜 읽냐는 말을 할 때면 그저 취향이려니 했는데 이제는 너무 화나고 슬퍼서 차마 못 듣겠다. 자기 계발서, 인문서, 전문서적 등은 그 책을 쓸만한 지식과 정보를 오랜세월 연구하여 습득한 것에 경의를 표하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문학이 지식과 정보 외에도 상상력, 표현력, 감수성, 경험, 구성력, 매력 등 다양한 요소가 다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더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소설가들이여 기꺼이 박수를 받으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시민 작가는 다방면을 가진 작가다. 엘리트인 데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섭렵하여 지식과 정보와 소양도 충분하고 사회를 보고 느끼는 남다른 감각을 가진 탓에 남다른 경험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항소이유서를 백여 장 썼다가 자신도 몰랐던 작가로서의 능력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타고난 유형이었던 것이다. 정확하다 못해 까탈스럽기도 하고 무모한 면도 있지만 된 사람을 알아보고 믿고 사랑할 줄 안다. 세상 사람들이 두루두루 행복한 사회를 바라는 순수하고 따뜻한 열정이 있다. 현존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게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이번 연재는 작가 이전에 유시민이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은, 그리고 여기도 또 유시민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썼다. 연재만 소홀했을 뿐 책은 한 달에 서너 권씩 계속 읽어왔는데 그중에서 이 책은 큰 고민 없이 연재 리스트에 올렸다. 저자는 개인의 삶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해주지만 교훈은 가져가든지 말든지 하는 느슨한 태도를 취한다. 그저 인생은 양심껏 부끄럽지 않게 소신대로 살 돼 그 안에서 즐겁게 살라고 말한다. 다만 사랑하고 연대하라고, 인생을 뭐 같이 살면 절대 잘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의 녹록지 않았던 경험, 해박한 지식과 교양, 아주 쉽고 다정한 고유의 문체가 어우러져 술술 읽히니 추천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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