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지붕집 만장이 Nov 01. 2023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장소, 화장실

종이 인형, 틴트 그리고 고양이들

이게 다 에어컨 때문이었다. 집에서 쪄 죽는 한이 있어도 에어컨 때문에 친척집을 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9살의 어린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척추수술을 하던 날부터  턱부터 골반까지 통깁스를 하는 날에 이르도록 엄마는 쉬지도 못하고 나를 돌보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지친 엄마를 위해 나는 에어컨을 핑계로 친척집에 보내졌다. 이건 에어컨 때문이 아니라 아파서 엄마를  힘들게 한 나 때문인 것이다. 아니지! 이건 감기약 때문이다. 엄마가 임신한 줄 모르고 먹은 감기약 때문에 내 척추가 기형이 된 거다.  점점 기울어지는 척추 때문에 심장이 눌리고 폐가 찌그러져서 수술을 한 거니까 감기약이 진짜 원흉이다. 어찌 됐건 에어컨이 있는 친척집에서 편히 쉴 수 있을 줄 알았던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여기 큰집에선 친할머니가 나를 돌봐주신다. 누워먹는 밥. 빨대로 먹는 물. 누워서 읽는 책. 누워서 해결하는 큰 거 작은 거. 모두 누워서 해결하려니 힘들지 않은 게 없었다. 엄마도 할머니도 힘드시겠지만 나 역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도 난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민폐 끼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에 절망감 마저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했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나흘.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방 한쪽에서 등을 보인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붙임성 좋게 할머니랑 쉽게 말을 하는 내 성격이 아닌지라 뭐하는지 궁금하면서도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눈을 굴려 할머니 뒷모습만 바라봤다.


"할머니 뭐 해?" 어렵사리 내가 말을 꺼냈다.


"주식이가 방에서 니 똥내난다해서 더덕 까는 중이다."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렵사리 운을 뗀 내 말이 부끄러워 입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주식이는 사촌오빠였다. 내가 그 오빠의 방을 쓰고 있으니 자신의 방에서 대소변 냄새가 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또 어떻게든 냄새를 덮고자 더덕을 매일 까고 있었고 할머니와 엄마를 힘들게 하고 있는. 아니 가족을 힘들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저 멀리 우주 밖으로 밀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음날, 나를 찾아온 엄마를 조르고 졸라 내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결국, 드디어, 마침내  우리 집에도 에어컨을 설치했다!!!


계절이 바뀌고 깁스를 한 지 1년이 지났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깁스를 잘라내었다.

깁스를 모두 잘라내자 나는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다시 걸음마를 배워야 했다. 못 걸으면 화장실을 갈 수 없으므로 정말 열심히 연습해서 걷게 되었다. 오랜만에 화장실을 가게 되었던 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세상은 아름답고 화장실냄새도 향기로웠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을 드나들었지만 이젠 달랐다. 같은 화장실이지만 다른 화장실이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행복은 화장실에 있었다. 눈은 화려한 곳을 쫓지만 마음은 언제나 편한 곳에 머문다. 철저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개인만의 공간 화장실.  사찰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해우소는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으로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화장실이  영어로는 Restroom- 편안한 곳이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화장실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장소다.


중년이 되어버린 지금도 난  더덕향을 맡으면 그 기억이 난다. 지옥 같았던 1년과 함께 화장실을 다시 갔던 기억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주어진 행복에 더 감사하고 싶어 진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