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잠 Nov 06. 2022

#4. 쓰레기

 시리얼 킬러가 되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죽여보기는 처음이다. 이젠 아무 느낌도 느끼지 않고 죽일 수 있다.


올 9월에 택배가 왔다. 택배로 운송된 물건은 이상 없이 잘 도착했다. 최고의 물건이었다.

그러다 10월 중순 여럿이 집안을 급습했고 난  무엇을 노리는지도 모르고 대적해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민첩하기 짝이 없는 놈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럿을 빠르게 죽였다. 혼자 여럿을 해치워서일까.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놈들은 그날부터 틈만 나면 나타났다. 집안 곳곳에 숨어있다가 방어를 소홀히 할 때면 나타나 공격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없는 틈을 타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내가 없을 때 막걸리를 훔쳐마시면서 날 조롱했겠지. 그 생각에 화가 나서 나는 나타나는 족족 죽여버렸다. 분노의 응징이었다.


11월 6일 일요일 오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많은 놈들이 공격을 해왔다. 숨어있을 만한 곳을 찾아 선공 격을 해야만 했다. 먼저 주방 싱크대에 숨어있던 몇몇을 잡아 고문했으나 아무것도 불지 않았다. 독한 놈들이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더 많이 발견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베란다 구석에서 눈에 들어온 상자 하나가 눈에 띈다. 9월 추석에 받은 과일택배! 집수리한다고 거기에 두고 까먹어버린 사과와 배들!


꼭 열어봐야 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분명 열어보지 말라고 할 것 같다. 하지만 난 열고 말았다.

약 400마리 정도로 추정되는 놈들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순간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대부분 날아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뚜껑을 닫고 1층.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달려간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과일의 썩은 즙과 미이라가되어가고 있는 몸체까지 미끄러지듯 쓰레기통으로 떨어지는 걸 본 후에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오늘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모기약과 부채를 이용해 집안에서 보이는 놈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렇게 많은 벌레들을 죽여본 건 처음이다. 시리얼 킬러가 된 느낌이다.

아까운 과일들의 명복을 빌며. 오늘의 수다를 맺음.

 

작가의 이전글 #3. 색연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