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잠 Nov 03. 2022

#1.선인장

괴물이 아닌 나에게

예전엔  전자파를 막겠다고 선인장을 컴퓨터 옆에 두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엔 애지중지 하다가 어느샌가 존재를 까먹고 만다. 결국엔 전자파를 막아보겠다는 처음의 의지마저 사라지고 말라비틀어진 선인장은 잊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버려졌고 애초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빈자리만 남곤 했다.

사실 난 산세베리아나 스투키 같은 식물들만큼 선인장을 좋아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 어린이 대공원 식물원에서 커다란 선인장을 본 적이 있는데 먼저 그 크기에 압도당했고 문득 어디선가 보았던 공포영화 헬레이저 포스터를 연상케 했다. 선인장과의 소개팅에서 첫인상이 별로 였던 경우라고나 할까.


이혼을 할 무렵 난 여러 종류의 다육이를 기르고 있었다. 파릇한 율마와 페라고늄도 키우고 있었는데 숙려기간 동안 난 그 아이들을 잘 돌볼 수가 없어 모두 말라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다육이들도 율마도 페라고늄도 모두 죽었다.  죽은 율마를 치우며 가시에 찔렸을 때 불현듯 선인장이 생각났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이 선인장이 되었다고 느꼈다.  가시를 몸 밖으로 내밀고 핀 선인장이 아니라 수많은 가시들이 나를 찌르고 있는 선인장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가시들이 촘촘하고  빼곡하게 박힌 내가 그 헬레이저 포스터 속의 남자처럼 괴물이 돼버렸다고 생각하니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물론 도망갈 곳도 없으면서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시중에서 '나는 별이다'라는 시가 있다. 


나는 먼 지평선에 홀로 떠있는 별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펴보며 세상을 경멸하다가

스스로의 격정에 못 이겨 불타버리고 만다.


나는 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다

묵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

그러면서 새로운 죄를 쌓아가는 바다이다.


나는 당신들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존심 하나로 자랐고, 자존심 때문에 속았다.

나는 국토가 없는 왕이다.(하략)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추방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날 내쫓지도 않았고 누가 날 떠밀어 보낸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나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고 추방시킨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아직 선인장이다. 물을 잘 안 먹어서 선인장이기도 하고 척박한 환경을 잘 견뎌서 선인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시를 내 몸에서부터 길러낼 줄 아는 강해진 선인장이다. 

가시에 박혀 아프다고 울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선인장이 되었다.

아침이 되면 나의 잘 다듬어진 가시를 재정비하고 오늘 하루를 또 강하게 헤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이젠 가시에 찔려 울지 말고 나를 그리고 아이를 지키는 용감무쌍한 선인장으로 살고 싶다. 


<<덧붙임>>

요즘은 혼자 글을 쓰거나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을 때 낚시하러 가는 친구의 차를 타고 바다로 간다. 

친구는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고 나는 글을 낚는다. 선인장 모텔에서. 










  




작가의 이전글 죽고 싶어...라는 문자가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