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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잠 Nov 04. 2022

#2. 감기약

수다시간의 단축

감기에 걸린 아들의 약이 식탁 위에 있다. 아들 감기가 많이 심하지 않아서 항생제는 없지만 비염약이 섞여있다. 비염약이 섞인 감기약은 먹으면 백발백중 졸리다. 내가 감기에 걸려 먹은 약은 거의 다 그랬다. 먹고 좀 있으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쯤에서  양들이 담을 넘는 걸 구경하다가 양이 너무 많아져서 눈을 감고 만다. 그곳이 버스 안이건 사무실이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 번은 독한 감기약을 먹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정말 이 세상과 저세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양인지 염소인지와  햇살 아래 넘어가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갑자기 악랄한 늑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는데 자면 어쩝니까!!" 택시 기사였다. 화내는 아저씨의 목소리에도 나는 양과 염소와 햇살 아래서 노닐었다. "아이씨 아줌마!!!" 

눈을 떠보니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짖네.. 어? 개가 아니구나. 참 개 같네. 헷갈리게.


아들이 감기약을 먹은 지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녀석은 졸린 기색도 없다. 나처럼 이 세상과 저세상을 넘나 드는 것 같지도 않다. 감기약은 졸려야 제맛인데 아들은 태연하게 티브이를 보고 총싸움도 하고 유튜브도 본다. 

신기한 일이다. 녀석이 강한 건지 감기약이 약한 건지 모르겠다. 감기에 걸리고도 잘 먹고 잘 놀아주니 다행이다.


아이가 아프다. 그것의 의미는 

신밧드의 모험마냥 끝없이 펼쳐지며 용솟음치는 집안일 때문에 정신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내 몸이 좀 힘들면 어떠랴. 빨리 낫기만 해 준다면!

그리고 또 하나 작은 바람이 있다면 아들 다음 타자는 내가 아니기를. 또 양들과 햇살 아래 나른해지는 일없이 우리 모자의 겨울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너무나  바빠서 지하 1500미터 암반수 아래에 고이 묻어두고 내일의 수다에서 다시 캐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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