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시간의 단축
감기에 걸린 아들의 약이 식탁 위에 있다. 아들 감기가 많이 심하지 않아서 항생제는 없지만 비염약이 섞여있다. 비염약이 섞인 감기약은 먹으면 백발백중 졸리다. 내가 감기에 걸려 먹은 약은 거의 다 그랬다. 먹고 좀 있으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쯤에서 양들이 담을 넘는 걸 구경하다가 양이 너무 많아져서 눈을 감고 만다. 그곳이 버스 안이건 사무실이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 번은 독한 감기약을 먹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정말 이 세상과 저세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양인지 염소인지와 햇살 아래 넘어가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갑자기 악랄한 늑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는데 자면 어쩝니까!!" 택시 기사였다. 화내는 아저씨의 목소리에도 나는 양과 염소와 햇살 아래서 노닐었다. "아이씨 아줌마!!!"
눈을 떠보니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짖네.. 어? 개가 아니구나. 참 개 같네. 헷갈리게.
아들이 감기약을 먹은 지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녀석은 졸린 기색도 없다. 나처럼 이 세상과 저세상을 넘나 드는 것 같지도 않다. 감기약은 졸려야 제맛인데 아들은 태연하게 티브이를 보고 총싸움도 하고 유튜브도 본다.
신기한 일이다. 녀석이 강한 건지 감기약이 약한 건지 모르겠다. 감기에 걸리고도 잘 먹고 잘 놀아주니 다행이다.
아이가 아프다. 그것의 의미는
신밧드의 모험마냥 끝없이 펼쳐지며 용솟음치는 집안일 때문에 정신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내 몸이 좀 힘들면 어떠랴. 빨리 낫기만 해 준다면!
그리고 또 하나 작은 바람이 있다면 아들 다음 타자는 내가 아니기를. 또 양들과 햇살 아래 나른해지는 일없이 우리 모자의 겨울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너무나 바빠서 지하 1500미터 암반수 아래에 고이 묻어두고 내일의 수다에서 다시 캐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