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흑막들은 똑똑하게도 전략을 바꿨다. 지금까지 흑막들은 나를 육체적 물리적으로 감금했다. 나를 천으로 묶거나 나무 창살로 가두고 항상 감시를 했다. 최근엔 부실해 보이는 종이벽으로 내가 가는 방향을 막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점점 커가고 조금씩이라도 움직이기 시작하자 흑막들은 더 이상 나를 물리적으로 막기 힘들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 듯했다.
수정된 전략을 난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곳곳에 징후들이 있었다. 남흑막은 나를 보며 "아빠 아빠"라는 소리를 계속해서 질러댔고 여흑막은 남흑막에게 지지 않겠다는 냥 "엄마 엄마"를 질러댔다. 계속 듣다 보니 나도 한번 소리를 내봐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그건 흑막들이 바라는 바라 생각되어 최대한 참고 있다. 과거에도 나에게 "귀 없다. 귀 없다."라며 나를 좌절하게 했지만 결국 내가 손을 움직이게 됐을 때 내 귀가 멀쩡히 있는 것처럼 속은 적도 있었다. 비록 이전엔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종이벽이 왔을 땐 알아차렸어야 했다. 나를 막기 위해 한 가지 색에 문양이 없어도 됐지만 굳이 여러 가지 문양이 들어간 알록달록한 벽을 가지고 왔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그렇다 흑막들은 물리적으로 나를 구속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적인 세뇌를 하기 시작했다. 남흑막은 딱딱한 판들을 가지고 와 땀을 뻘뻘 흘리며 그것들을 서로 붙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판들과 씨름한 결과 그럴듯하게 뭔가가 만들어졌다. 그곳에 여흑막이 종이로 된 것들을 하나 둘 올려두었다. 올려 둔 것들은 색상과 문양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흑막들을 보며 난 앞으로 벌어질 일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두근거렸다.
어느 날 남흑막이 은근슬쩍 운동으로 지친 내 옆으로 왔다. 그의 손에는 판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로 된 것이 쥐어져 있었다. 남흑막은 나의 머리와 남흑막의 머리가 나란히 되도록 누웠다. 그리고는 종이로 된 것을 나에게 보여줬다. 남흑막은 노르스름하고 둥그런 모양을 가리키며 "달님 달님, 달님 이야기"라고 나에게 하나하나 주지시키듯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종이를 넘기니 검은색과 하얀 문양이 있었고 남흑막은 "고양이 고양이"라고 또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행동은 한동안 계속 됐다. 비슷한 문양도 있었고 다른 문양도 있었다. 그때마다 남흑막은 나에게 그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남흑막은 결국 종이가 더 넘길 것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이런 행동을 했다. 남흑막도 힘들었는지 끝났을 때 종이를 덮고 은근슬쩍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여흑막은 그런 남흑막이 탐탁지 않았는지 난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한번 더 읽어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남흑막은 변명하듯 "더 읽어 줄라 했다. 말 안 하다가 하니깐 목이 마르네."라고 능글맞게 이야기하고 재빨리 물을 마시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난 문양들이 신기하고 남흑막의 소리가 궁금해서 계속 듣다 보니 어느 순간 문양들을 남흑막이 말하는 소리와 일치시키고 있었다. 예전엔 노르스름한 둥그런 모양은 그냥 둥그런 모양이었지만 이제는 달님이 되어버렸다. 흑막들이 바라는 대로 난 그 모양을 인식하게 됐다. 남흑막뿐만 아니라 여흑막도 나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반복해서 읽어주자 어느덧 난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내 세상은 그들이 정해주는 대로 정해져 버렸다. '안돼. 난 세뇌 당하고 있어.' 하지만 난 그들에게 갇혀 피할 수 없는 몸일 뿐. 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종이를 보는 것도 지루해서 결국 울어버렸다. "응애 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