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쭉하고 불그스름한 물체를 '당근'이라고 한다. 요새 여흑막은 이것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거 같다. 손에 작은 상자를 보며 시도 때도 없이 '당근'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얗고 토실토실한 몸과 긴 귀를 한 귀여운 생물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흑막도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지 '당근'을 좋아하는가 보다.
여흑막은 '당근'을 이야기하면 좋은 일이 있었는지 남흑막에게 자랑스레 말을 건넸다. "와~ 이거 엄청 싸게 샀어." 하지만 여흑막의 자랑스러운 미소와 달리 남흑막은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남흑막은 여흑막의 지시가 있었는지 평소에 입던 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는 남흑막의 발걸음처럼 무거운 철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려 해.'
많은 시간이 지나 남흑막은 거대한 물체를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그것은 창가에 있는 식물들과 같이 초록색이었다. 그것에는 새빨간 새, 파란 나비, 둥그런 물체, 엎드린 악어 등 많은 것들이 달려 있었다. 그 물체의 가운데는 뭔가를 넣을 수 있도록 불안하게 아무것도 없이 푹 꺼져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내가 비밀을 하나 공개하겠다. 흑막들이 나를 감시하듯 나도 흑막들을 은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내가 발견한 사실들 중 하나를 가르쳐 주자면 여흑막은 무언가를 닦는 것에 엄청 집착한다. 내 입이나 손에 조금이라도 뭔가 묻으면 쏜살같이 닦아 내고 남흑막이 칠칠치 못하게 나처럼 먹다가 식탁에 흘리면 어느샌가 치우고 있었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흑막의 입에 묻은 건 여흑막이 닦아 주지 않았다. '훗. 남흑막은 나보다 더 관리를 못 받네.'
여흑막은 초록색 물체도 어김없이 닦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상한 물을 먼저 꼼꼼히 뿌렸다. 조그마한 먼지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여흑막은 초록색 물체를 요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닦아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닦았는지 초록색 물체는 빛을 받아 번쩍번쩍했다.
나의 불안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남흑막은 나를 번쩍 들어서 그 물체의 가운데에 나를 넣어버렸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가 된 듯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나의 짧디 짧은 다리가 바닥에 닿을 듯 말듯하게 난 매달려 있었고 처음으로 혼자 서게 된 나는 두려움에 흑막들을 쳐다보았다. 흑막들은 나에게 따라 해 보라는 것처럼 나비의 날개를 비비기도 하고 악어와 둥그런 물체를 눌렀다. 날개에서는 부스럭부스럭, 악어는 삑삑, 둥그런 물체는 삐리링하는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신기한 소리 홀리듯 만져보았다. 내가 만질 때에도 똑같이 부스럭부스럭, 삑삑 소리가 울려 퍼졌고 기묘하고 서늘한 감촉도 느껴졌다. 내가 만질 때 어떤 것은 흔들흔들 움직이기도 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입에 넣어 맛도 보았다. 확실히 맛은 없었다. 난 점점 과감해져서 그 물체들을 세게 쳐보기도 하고 깨물어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신이 나 그곳에서 펄쩍펄쩍 뛰며 손으로 강하게 물체들을 내려치고 있었고 그것들은 내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새하얗던 내 안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순수했던 내가 이토록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을 하다니. 내가 이럴 리 없어. 분명 이건 흑막들 탓일 거야.' 흑막들은 나의 타락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동안의 감시가 무색하게 나를 내버려 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초록색 물체는 감시도 할 필요 없게 날 타락시키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나는 타락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상반되게도 나의 과격한 행동에 신나 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 흔들리는 나의 마음과 같이 내 눈앞에는 나비가 팔랑거리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난 괘씸한 나비를 한번 더 내려치며 흑막들의 무시와 나의 타락에 저항하듯 크게 울어버렸다. "응애 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