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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향 Jun 25. 2024

남편만 기다리는 집강아지

는 나

남편과 나는 소개로 만나 4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만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였던가. 내가 먼저 결혼은 내후년이 좋겠다고 했고, 남편은 자기랑 결혼을 할 생각이냐고 되묻고는 흔쾌히(정말?) 좋다고 했다. 간혹 나랑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을 것 같은지 남편에게 묻곤 한다. 그럼 남편은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을 못해봤다며,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게임이나 하면서 폐인처럼 살았을 것 같다고 답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남편이 게임을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남편의 대답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요즘 우리 부부는 육퇴를 한 뒤 서재에 틀어박혀 나는 브런치 연재글을 시작으로 써야 할 것들을 써내고, 남편은 다시 시작한 게임 삼매경이다. 오늘 일기의 내용은 남편의 취미에 관한 것으로, 정확히는 그 취미를 용인해 주는 내 마음에 대한 것이다.




어제 불현듯 글을 쓰다 게임 삼매경인 남편에게 생각해 보면 우리 참 성격이 잘 맞지 않느냐고 물었다. 남편의 대답은 잠깐 집중 좀 할게,라는 딴소리. 나는 대체로 남편의 이런 모습을 재미있어하는데, 집중 좀 하겠다는 말 대신 '그런 것 같다'거나, '당연하지' 등등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와야 할, 내가 기대한 바의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게 새롭다. 누군가는 그게 뭐가 재밌냐며, 게임하느라 내 말에 대꾸도 잘 안 하고 육퇴 후 깊은 대화랄 것도 없는데 뭐 그리 좋냐고 타박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이게 나쁘지도 않고, 도리어 편하기도 하다.


연애 시절, 남편이 내게 하는 장난스러운 행동이나 말을 두고 주변 지인들이 나를 착하다고 추켜세운 적이 많다. 저런 말을 어떻게 받아주냐며 나를 마치 둘도 없는 여자친구상인 것처럼 봤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이게 왜 못 받아줄 만한 말이고 행동이지, 싶을 때가 많았다. 실제로 그런 일화들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내게 타격감이 없었던 건 분명하다. 주변인들은 서글서글하고 마냥 밝고 장난 좋아하는 남편을 그저 가볍고 쉽게 여기는 면들이 있는 듯하지만 남편은 오히려 내 편견을 깨 주는 사람이고 새삼 어떤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결혼 전보다 이후에 더 지극히 느끼며 깊이 고마워한다.



남편이 처음 헬스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큰 아이를 낳고 육아하며 관둔 게임을 이제와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땐 달갑지 않았다. 나는 아이 둘을 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데, 이 사람은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제 취미를 챙긴다는 생각에 배신감까지 느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실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 나는 엄마로, 아내로, 또 나 자신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가 버겁고 벅차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서 취미 같은 걸 언제 꿈이라도 꿔봤는지, 새삼스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 이후의 이 삶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건지, 돌연 제 몸 가꾸기와 오랜 숙원 사업처럼 묻어두었던 게임을 슬그머니 다시 꺼내는 것이다. 운동을 하는 건 건강을 위해서도 좋으니 달갑지 않은 마음을 나 스스로 잘 다독여보겠지만, 게임은 글쎄, 한동안 다독여지지 않았다. 육퇴 후 특별히 깊은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를 두고 저 혼자 탈출구를 마련하는 것만 같아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무얼 좋아하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스트레스를 푸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런 원망을 키워 며칠은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사람이 나의 모든 면을 불평불만 한 번 갖지 않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매일을 육아 전쟁에서 분투한다 해서 이 사람까지 그런 삶이 당연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 남편이 내게 보여주는 노력만큼 나도 남편의 취미 정도는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론 어느 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남편이 퇴근 후 운동을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선다. 또 한 날은 잘 자던 아이가 깨서 울어도, 남편은 게임 레이드를 뛰느라 내가 글을 쓰다 말고 방으로 들어가 봐야 하는 게 못마땅해 눈으로 욕을 한다. 물론 남편은 좌불안석이지만, 레이드는 관둘 수 없는 모양.

하지만 그럼에도 남편과 나는 서로를 잘 보듬어가며 살아가는 중인 듯하다. 못마땅한 것 투성이에서 사랑해야 마땅한 구석들을 키워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날 하루가 어땠는지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지금도 퇴근 후 남편이 곧장 집으로 와주기를 일말 바란다. 당연히 운동을 가겠거니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오늘은 그냥 오는 것 아닐까, 기대한다. 오늘도 남편이 운동을 하지 않고 집에 오는 기대를 품었다. 퇴근 후 운동을 다녀오겠다는 남편의 전화가 실은 장난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두 아이와 저녁을 먹는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환청도 들은 것 같다.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는 지인 하나 없는 곳에서 문득 외로움이 거칠게 몰려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의지하고 믿을 데라곤 남편뿐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남편의 퇴근만 기다렸었다. 그런 나를 두고 누군가 내게 주인 기다리는 집강아지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거기에 크게 공감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집에서 남편만 기다리는 집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의지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상대가 남편이어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어서, 얼마간의 다정한 대화를 나눈 뒤 각자 할 일에 몰두하는 이 밤이 더없이 소중하단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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