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감성 에세이, 애도 에세이, 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모든 사람을 비평하는 위치에 ‘스스로’ 선다는 것은 참 오만해지기 쉬운 일이며, 애초에 그 무엇보다 오만한 작업 같다. 그래서 오만해지지 않으려 필사로 노력하는 것만이 그 일의 윤리를 지키는 방법이 된다. 자칫하다간 자신은 영원히 행할 능력도, 권한도 주어지지 않을 일을 바라만 보며 누가 뭘 잘못했는지만 관념을 녹음한 테이프처럼 지적하게 되니까. 과거의 ‘어떻게(원인)’와 미래의 ‘어떻게(대안)’는 없이 무한히 모든 일은 잘못되었고, 여기엔 특정 사람의 잘못이 있다고 비판 아닌 비난을 쏟아내며, 답을 정한 모습으로 규탄하고, 일갈하게 되니까. 요즘 언론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비평가도, 대안의 모색가도 아니다.
주변에 자신이 뭘 하든 ‘넌 참 못하고 못났다’고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진짜 그 말을 들을 정도로 못나기만 한 사람인지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넌 이런 이런 점이 어떤 이유 때문에 참 못났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 좋을 거야’라고 말하는 이성적인 타입이든지 ‘넌 이런 이런 점은 참 좋아, 하지만 이 점을 조심하렴’이라고 말하는 감성적인 타입의 사람을 두 팔 걷어붙이고 세계를 유랑해서라도 찾는 편이 옳다. 즉, 맨 앞에서 예시한 사람은 그가 얼마나 정당한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느냐의 여부를 떠나 방식에서 완전히 그릇된 사람인 것이다. 또,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평가하기에 앞서 그에 마땅한 방식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의 비판 역시 정당할 리 없다.
어디서든 말로만 으스대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슬그머니 뒤로 빠져있거나 제때 못 해내는 사람을 보면 얄밉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보수언론을 마치 글이 아닌 ‘사람’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소불위의 위치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올려 두고 남들은 관심이 없어 안 지니기도 하는 펜대를 꼭 쥔 게 전부이면서, 마치 세상과 자신이 이 세상에서 배척하기로 정한 특정인을 (누구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타고나거나 훈련된, ‘허락받은’ 지적 체계로 비방할 권한과 능력이 타인을 넘어 주어진 게 당연하다는 듯이 믿고 행동하는 일이 심히 ‘작가주의적’으로 보인다.
과거부터 많은 사람이 기자라는 직업을 ‘공정’, ‘객관’이란 단어와 어우러지는 함의로 이해해 왔지만, 미안하게도 지금 특정 언론의 기사들은 그들이 우리와 같은 ‘직장인’일 뿐이거나, 순서나 제목만 살짝 바꾼 기사를 사실확인 없이 미친 듯이 송출하는 ‘바이럴 마케터’, 자신이 승부나 판돈을 건 쪽의 승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뒤에서 밀어주는 ‘사업가’나 ‘투기꾼’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화 한 통이면 당사자에게 확인 가능한 사안을 의혹만으로 꼭지로 만들어 내보내는 일을 보면 ‘자신만의 컬러로 쓰인 독창적인 기사를 송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걸까?’ 궁금하다.
:::
논리적 글쓰기의 기본 구조는 ‘문제 제시 - 원인 설명 - 대안 제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코로나와 1년여간 함께해 온 지금의 언론은 겨울과 함께 찾아온 코로나 3차 대유행 시기를 오직 “공포 - 공포 - 공포”의 메시지로 일관한다. 공포가 모든 자리를 채운다.
글쓰기의 2, 3단계인 ‘원인 설명’과 대안 제시’는 타인 앞에 글이라는 무기로 주장을 벼려놓는 기자이자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인 데도 폐기한 채, “문제, 문제, 문제! 여기 문제가 있어요!”라고 일관하며 소리치는 기사만 많다는 얘기다. 이제 ‘단독’이란 꼬리표가 붙는 기사가 보여주는 문제의식의 우스움은 둘째칠 정도다.
상식 선에서 이해하듯 기자가 어떤 방향이든 신념을 지닌 이라면 모든 게 망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망했더라도, “망했다!”고만 소리 칠 게 아니라 망했다면 왜 망했는지, 어떻게 추스를 것인지를 말해야 하고, 이 지점을 더 상세히 공들여 말해야 한다. 그가 신념을 지녔다면 말이다.
신념을 지닌 자는 무엇보다 간절하기 때문이다. 원인을 파악해서 전철을 밟지 않고, 대안을 제시해서 후속을 도모하지 않으면 스스로 아플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쓴다. 하지만 요즘의 기사엔 오직 ‘주장’만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썼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오도하는 기사가 많은 것이 문제다. 문제를 지적하는 건 사실에 기반하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든지 감상적인 일이 될 수 있어 다시 문제가 된다.
기자는 ‘사실을 통해 진실을 추적하는 자’고, 지식인으로서 ‘공동의 이익’에 그 지적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자신만의 관점이나 신념이 있을 것이고, 그게 자신만의 이익이 아닌 ‘공동의 이익’을 대변해서 꼭 ‘지금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말하는 방식을 바꾸어서 제대로 비평하고 설득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편향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인사는 추대하고, 싫어하는 인사는 코가 삐뚤어지도록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운영하는 주체가 누구이든, 도움을 주는 이성적인 조언과 따뜻한 독려를 견지해야 한다.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 비난이 견제 없이 부여된 은폐적 권한(=글)으로 특정 지위에서 많은 사람을 선동하면 그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과 나아가 우리의 사회와 세상이 망가진다.
:::
일부 언론은 사실검증 의무에 충실한 제대로 된 비평가도, 시민의 삶과 사회를 위한 대안의 모색가도 아니어서 이제는 시민이 기사의 질과 의도를 잘 판별해야 한다.
오직 ‘문제 - 문제 - 문제’로만 기사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제를 제시한 뒤, 그 문제를 발생하게 한 원인을 탐사하는 순간 그들이 거짓 문제 위에 세운 주장이 무너져 더 이상 한 글자도 쓸 수 없기 때문이고, 원인은 생략한다 쳐도 대안을 함구하는 이유는 사실상 그 문제가 잘 해결되든 말든 내 손에 떨어지는 이익 외에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해결되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주장할 뿐 대안을 알더라도 공유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주장만 하므로 비난이 되고 만다.
말했듯, 절실한 자는 ‘쓴다’. 하지만 그들은 쓰지 ‘않는다’. ‘공격’하는 일에 목표가 있으므로 계속 문젯거리를 찾아서, 대부분은 문제가 아닌 것도 문제로 만들어서 이동하면 된다. 그것이 그들의 숙주이다.
누차 말했듯, 원인을 생략한 ‘문제(주장)’로만 글을 쓰는 이유는 애초에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자의로 생략한 것이 아니라, 없기 때문에 쓸 수 없는 것이다. 문제를 발생시킨 원인이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문제 자체가 가짜라는 의미다.
기사를 읽을 때는, 그 글이 근거라고 들이미는 것들의 이면을 꼼꼼히 잘 들여다보라. 이미 형성된 여론의 채집인지, 아니면 그 글이 자신의 주장으로 여론을 형성해 그제야 진짜로 태어날 여론을 근거 삼아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내거는 구호로 이루어져 있는지, 일단 독자이자 청자이자 시민이자 그 자체로 상식이자 여론인 자신의 마음에게 물어보아라. 대부분은 특정한 기사들의 구호 아래, 그 구호에 영향을 받고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위시하는 가짜 여론이 생성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권리로 특정인에게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주어지는가? 설사 모든 것이 ‘정말’ 잘못되었다한들, 그 이후는 없나? 그 잘못되었다는 일이 진실로 잘못한 일인지 제대로 규명한 뒤 씀으로 비평하는가? 수많은 가짜 뉴스들, 진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부분을 떼어와 전체의 진실인 양 부풀리고, 문제가 되면 슬그머니 삭제하고 마는….
누구나 삶에 적지 않은 과오를 가지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삶의 최소한의 공통된 진실’이며, ‘인간이 가져야 할 기초적 겸양’일 때, 타인을 규탄하는 태도 하나만 잘 살펴보아도 한 사람이 ‘펜대’를 흔드는 모습이 타인을 할퀴기 위해서인지 타인의 마음에 진정 잘 스며들기 위해서인지를 분간할 수 있다.
:::
이제 모두가 같은 이야기만 반복할 때, 진짜 멋진 사회적 담론이 되는, 몇 발 앞서 나가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는 기사를 읽는다면 가슴 벅찰 것이다. 한국 국민을 넘어 진정한 인류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려는 태도의 기사가 절실히, 목마르게 필요하다.
AI식 복제 기사, 내용의 순서만 바꾼 짜깁기 기사는 전부 퇴출되어서 원안을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의 보통일관의 논리가 ‘기자’와 ‘기사’라는 타이틀로 사회에 노출될 정도의 자격을 갖추었는지 제대로 검증해야만 한다. 언론이 고증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미래의 길을 선도해야 하고, 그것은 말했듯 한 개인, 한 국가를 넘어 인류가 살아남는 방향의 길목에 서 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신문기사에서 ‘사실’만이 아닌, ‘인간’이 함께 다뤄졌으면 좋겠다. 언론이 재차 나아가야 할 점은 바로 그 점에 닿아 있어 보인다. 물론 가장 중요하고 너무도 당연한 건, 사실의 확립이겠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확립하려는 ‘의지’는 자신을 둘러싼 특정 세력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개체에 대한 투명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 사랑이 없다면 없는 것을 요구할 순 없다. 대신 공정성의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무소불위의 펜을 흔드는 언론이 스스로 부여한 오만한 언론권력을, 앞으로는 시민이나 제3기관이 직접적으로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공공연한 사실을 오보한 기사는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결국 기사란 자신이 지닌 감정의 표현만 극도로 절제하는 것이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무리를 모으는 행위이고, 때론 그 무리를 키우기 위해 논조를 높이는 행위이다. 너무도 당연히 그 일은 ‘사실’에 기반해 진행되어야 하지만 내내 강조하듯 ‘실수’ 아닌 ‘의도’로 심각하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흔히 기사는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일부 언론인들이 농담처럼 말하는 ‘공정한 편파’, ‘편파적 중립’이란 단어를 더 사랑하려고 한다. 여기서 방점은 ‘공정’과 ‘중립’에 찍혀 있다. 대신 ‘나의 편파’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의 제스처다. 사실 그것이 자연스럽다. 편파적이되 객관성을 잃지 않고, 주관성을 객관성인 양 위장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란 편파적이다. 인간이 만들고 설계하는 로봇조차 중립적이지 않다. 편파적일지라도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있어서는 엄정한 기준으로 말한다는 것이 바로 이 ‘공정한 편파’, ‘편파적 중립’의 어젠다다. 완벽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사실’에 절실히 기대야만 한다는 것이다. 잘못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진짜 잘못한 점’을 찾아서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면 말이다.
기자 이전에, 100%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란 없다. (그러니까, 그 ‘중립’이란 게 대관절 무엇이기에? 흑과 백 중, 회색이 중립이라면 이는 때론 아예 없으니만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기사 내용의 당위를 말할 때, ‘중립을 지켰는지 아닌지’의 여부보다, ‘사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의 유무를 더 날카롭게 따지는 편이 빠를지 모른다. 대부분 ‘중립’이란 단어는 주관적으로 사용되거나 무언가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훨씬 많다. 단어 자체가 ‘주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기자에게 요구할 사안이 아니다. 또, ‘사실’일지라도 짜깁기 식의 일부 변용이나 입맛에 맞는 임의적 부분인용으로 본래의 맥락을 훼손한 것이 명명백백한 경우, 엄격하게 고발당해야 한다.
‘중립’이란 아름다운 단어는 가만 보면, 단어가 지닌 모호한 선의성으로 모든 진실과, 그 진실을 훼손하기 위한 악의적 의도들을 보호한다.
‘사실’은 검증할 수 있는 반면, ‘중립성’은 마치 마음 같아서 분리해 검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중립을 충실히 지켰다”고 호소하면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을 적시했는지 아닌지”는 문제와 관련이 있거나 없는 타인이라도 검증을 통해 충분히 “사실적 중립을 지켰다”는 주장의 진실성이 글 안에 닿아있는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기사란 짧은 단말마의 주장이 아닌 하나의 긴 글이어서 가짜 근거에 기대 의도를 가지고 작성한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와 의도를 기반한 채 작성되므로, 그 인위성의 ‘무의식적 복심’이 아닌 ‘의식적 의도’의 증거들을 결코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러한 패턴의 기사를 우연한 실수가 아닌 일상적으로 작성하는 이라면 그땐 그의 자격을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주장과 논리의 원안자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
그리고 여기, 더 본질적인 의문이 있다.
‘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중립’이란 단어로 숨겨야 하는가?
우리는 오랜 시간 그것을 겸양의 덕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어떠한 문제가 오랜 기간 고착화돼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태초로 돌아가 다시 사안을 깨끗이 바라보고 과거의 실패 위에서 그 논의를 아예 새로운 영역으로 소환하는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적어도 이러한 과제나 문제가 우리에게 산재한다는 사실은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것은 ‘중립’이 아닌 ‘사실의 부재’나 ‘일부 사실의 확대’란 지점 말이다.
언어가 삶의 중요한 수단인 이유는, 언어의 규정과 그에 따라 변모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에게 실리는 언어의 사회적 함의가 사람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인식이 행동을 낳아, 그것이 다시 사회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중립’이라는 허황된 가치에 목매기보다 탈피했으면 한다.
또 사실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을 다루되, 스스로 판관이 되는 일을 엄격히 멀리하는 것이다. ‘인간’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할 수 없는 세상사를 특정 사건에서의 ‘완벽하지 못했음’의 기준으로 마치 한 사람의 생의 전체를 헐벗겨 놓은 뒤 부정하는 작업 역시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심지어 악마조차 하지 않는 일이다. (악마에겐 모든 것이 애초에 ‘악’이어서 굳이 어떤 근거를 내세워 악을 규명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철학이 존재해야 하고, 언제나 글을 쓰는 자신 스스로도 완벽할 수 없음에 대한 겸연쩍음이 존재해야 한다. 명확한 범죄행위가 아니라면, 누군가를 비난하기에 앞서, 의혹을 부풀리기에 앞서, ‘만약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관련자에게 조금 부족하고 아쉬운 점은 있지만, 이 사람 정도나마 할 수 있었을지?’의 생각과 상상, 해석, 그 안에서 비롯된 여백과 질문이 기사 안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함부로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
잘한 건 듬뿍 칭찬해 주자. 아이에게 하듯이. 부족한 건, 격려해서 어떻게 더 좋게 나아갈지 함께 논의하자. 사람에게 하듯이.
가짜 뉴스가 판을 치지만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는, 전례 없는 위기 앞에서, 지금의 정부와 함께 ‘코로나’에 대항한다는 게 가끔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능력도 없으면서 욕하지 말자. 이제는 시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해져야 한다.